제3구간 영장산길 - 무채색 명상의 숲 속 길
영장산 정상을 넘어 태재로 가는 길은 가파르게 오르지도 내려가지도 않고 호젓한 숲길로 이어진다. 산 능선 따라 서쪽 분당 시가지나 동쪽 광주 산림을 한눈에 내려보며 걸을 수 있다. 길이 순탄하니 마음도 한가롭고 가벼워진다. 그러나 쉽사리 걷는 내내 마음이 들떠지진 않는다.
왜냐하면 영장산의 숲은 우거진 나무로 인하여 깊고 한낮에도 어둑어둑하기 때문이다. 하늘을 덮은 나뭇가지의 그늘은 사람의 그림자를 만들지 않고 그 모습을 감춘다. 그리고 숲에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러면 문득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의구심을 갖는다.
도심에 있다면 높은 빌딩이나 커다란 광고판으로 내가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있는 이정표가 되는데 숲에서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하늘 아래 참나무만 빼곡한 숲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없다. 하늘의 변화무쌍한 구름 중 양털 모양의 구름 밑이라고 할 수 없고 수피가 거칠고 잎사귀 반쯤 떨구어진 어느 커다란 상수리나무 앞이라고도 할 수 없다. 당최 이정표로 삼을 지물이 없다.
어쩌면 숲에 들어왔으니 그동안 번잡하게 부딪혔던 세상이랑 잠시라도 단절될 기회일 수 있겠다. 그러면 낯선 환경에 들어선 경험이 무척 감사하다.
영장산 내려오고부터 능선 따라 한없이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길이었다. 길 위에는 낙엽이, 나무에는 매달린 잎사귀가 모두 갈색으로 물들었다. 설악산과 오대산 쪽에는 벌써 울긋불긋한 단풍잎으로 오색 천지라고 한다. 여기는 단조로운 갈빛 천지다. 숲에서 천연 원색이 사라지고 단순한 색상만 남아 지루한 감도 들었다. 문득 스님들이 입는 승복이 생각났다. 승복이 화사한 색 대신 잿빛으로 물든 이유가 화려한 속세의 삶을 떠나 구도의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청빈한 승려가 색동옷을 입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니 갈빛 숲 속이 심심치 않고 은은하고 온화해졌다. 떨어진 잎들과 매달려 있는 잎들이 잡소리를 삼켜버려 사방을 고요케 했다. 오솔길은 구도의 길로 안내하는 듯했다. 직박구리처럼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던 일행도 침묵을 지켜 고요함은 한층 더 엄숙해졌다.
[나는 누비길을 걷는다 中]
다람쥐가 지나간 주변에 굵은 상수리나무 밑동과 닮은 바위가 있었다. 상수리나무 껍질은 흑회색이고 거칠게 갈라진 수피 모양인데 옆에 놓인 바위도 거칠게 갈라진 표면과 흑회색이 닮아 있었다. 오랜 세월 서로 마주 보다 보니 닮았나 보다.
묘하게도 거친 수피의 나무 곁에는 거친 바위가 놓여있고, 매끈한 수피의 나무 곁에는 매끈한 바위가 놓여있다. 그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닮고 닮았다. 바위와 나무는 아마도 자신들을 '우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영장산길은 화전 길이나 단풍 길은 아니고, 그렇다고 땀 흘리며 체력 단련하는 무미건조한 길도 아니다. 깊은 산속, 나무와 잎사귀에 파묻혀 숲 속으로 계속 들어가는 길이다. 등산이란 말은 산을 오르며 운동하는 체육활동인데, 영장산길은 등산이라 할 수 없고 대신 산에 들어간다는 입산이란 표현이 걸맞다. 그러고 보니 입산은 구도자가 가는 길이므로, 살면서 궁지에 몰릴 때 답을 구하기 위해 혼자 찾기 좋은 길이리라 싶었다. 발길을 재촉하며 걷다 보면 불경의 한 구절이 저절로 읊조리기도 한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가자 가자 저 피안의 세계로)
무채색의 영장산 숲길에는 간혹 팥과 비슷한 열매가 잔뜩 여문 팥배나무와 밤나무 몇 그루가 참나무 사이사이 자라고 있었다. 팥배나무의 빨간 열매는 잎들이 떨어져 파란 하늘을 캔버스 삼아 수많은 빨간 점을 찍어 놨다. 가을날 갈색 잎사귀와 황토색 흙길에서 보는 단조로움 속에서 팥배나무 열매는 빨간빛 천연 색상의 향연이었다. 갈빛 천지에 새빨갛게 알알이 찍은 점들이 인상적이다.
팥배나무 열매를 팥배라고 하며 사람도 먹을 수 있다. 당연히 새들도 즐겨 먹는다. 팥배나무 가지엔 유난히 직박구리가 앉아 요란하게 지저귀며 팥배를 부리로 콕콕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