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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 Oct 14. 2022

예의

아버지와 아버지 애인 모시고 제주여행 11

  "고마워. 만약 100이 만점이라면 120%를 했다."

  마지막 날 아빠가 말씀하셨다. 고마움을 표현해주는 게 고마웠다. 나는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아빠가 이렇게 목욕을 좋아하는지 알았다면 집에 있는 입욕제를 가져왔을 것이다. 제주공항에서 쓴 감귤향 핸드워시가 좋다고 말씀하셨는데, 아빠가 부산으로 가고 난 다음에야 공항 내의 가게에서 구매할 수 있는 걸 알아 아쉬웠다. 소포로 부쳐드릴까?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아빠는 내게 결핍감을 '주는 사람'이었지만 사랑에서만큼은 아리송하게 했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빠는 예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빠가 고맙다고 표현한 걸 '사랑'이라고 받아들이라고 하면 난 좀 머뭇거리게 되는 것 같다. 사랑이라고 하면 그간 나를 억울하게 하고 분노하게 했던 것들에 대한 변명을 듣고 싶어 진다. '예의'라고 하면 금방 수긍하게 된다. 고맙다는 표현도 나를 성인으로 생각하고, 혹은 독립적인 개체로 생각하고 예의 있게 한 말씀 같았다.


  지금은 인간관계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젊은 시절의 아빠는 경조사에 자주 다녔던 것 같다. 

  "아빠 또 가나?"

  "장례식이라서.... 결혼식은 안 가도 되는데 장례식은 가는 게 좋거든."

  "왜?"

  "좋은 일은 좋은 기분으로 있느라 정신없는데 안 좋은 일에는 가주는 게 좋다."

  이 뜻이 슬픈 일에 마음을 나누고 위로한다는 뜻인지, 왔다는 티를 장례식장에서 더 낼 수 있다는 건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난 전자로 이해했었다. 그래서 조사에는 되도록 참석하려고 노력했고, 부조금으로든 말로든 위로를 전하고자 했다. 실제로 내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도 와준 사람들 얼굴은 지금도 하나하나 다 기억에 남을뿐더러 앞으로도 그 고마움을 갚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렇게 아버지의 삶의 지혜(?)를 나눠줄 때면 나는 또 든든한 아버지가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예의를 물려받아 나도 예의 바른 어른이 될 수 있을 것만 같고. 

 

  엄마가 더 이상 말도 할 수 없게 되고 스스로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몸이 안 좋아진 시점이었다. 이미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했고, 말 그대로 죽음을 기다리는 나날이었다. 그래도 엄마는 살아 있었는데, 몸이 따뜻했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기도 했으며 뒤를 닦아주느라 몸을 뒤집으면 "으으으"하는 신음소리도 내었다. 엄마가 만나던 아저씨가 방문할 때면 엄마가 좋아하는 게 느껴졌다. 말도 못 하고 표정도 못 짓는 사람인데도 시선이 그 아저씨에게만 가 있었다. 혹시 아빠도 보고 싶지 않을까?

  오빠는 분명히, 혹은 당연히 아빠가 보고 싶을 거라고 했다. 당시 오빠랑 아빠는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져 서로 안 보고 지낸 지가 꽤 된 상태였다. 오빠가 아빠를 보고 싶어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아빠는 오빠의 번호를 차단했기 때문에 나만 아빠에게 연락할 수 있었다. 아빠, 엄마가 곧 돌아가실 것 같은데 와주실래요?

  '4시 이후에 가마.'

  기뻤고, 오빠도 좋아했다. 오빠가 아이처럼 좋아했는데 40이 다 되어가는 사람도 친아버지를 만나면 이렇게 좋아하는구나, 내심 신기했다. 물론 나도 오랜만에 아빠를 뵙는 거라 무척 설렜다.

  아빠는 아주 말끔한 모습이었다. 깨끗한 셔츠에 낡은 구두였지만 반짝반짝했다. 너무 오래된 구두여서 또 마음이 쓰였지만, 평소에 아빠는 구두를 전혀 안 신는 사람이어서 얼마나 예의 바르게 병원을 방문했는지가 보였다. 엄마에게 허락받지 않은 채로 아빠를 모시고 병실에 왔을 때는 그냥 주체 없이 눈물이 흘렀다. 오빠도 울고 아빠도 눈시울을 붉혔다.

  "어찌 이런 병에 걸렸나...."

  엄마 손을 잡고 안타까워하던 아빠의 말은 진심이었던 것 같다. 목이 매인채로 안타까워하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애달픈 신파극은 아니었지만 두 분은 헤어진 지 만 20년 만에 재회였기에 내가 모를 감정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엄마, 아빠를 내 눈에 동시에 담은 것도 20년 만이어서 생경하면서도 어딘지 익숙한 모습이었다. 나의 엄마, 아빠가 같이 있는 모습이라니...


  열흘이 지났을까, 엄마는 돌아가셨고 장례식장에 아빠를 불렀다. 아빠는 또 멀끔한 차림새로 장례식장을 방문했다. 나는 상주였지만 아빠는 문상객이었다. 아빠가 와준 것만으로도 기뻤다. 오빠와 나는 비교적 어린 나이었기 때문에 장례식장은 한산했다.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고 직장 동료가 없어 장례식에 방문하는 사람이 적어 고요했다. 너무 고요한 나머지 옆 방에서 우는 소리가 또렷이 들려 '누가 죽었나? 저렇게 울어.' 생각이 들었는데 진짜 누가 죽어서 우는 울음이었다. 그런 장례식장에 누구 한 명 찾아와 주는 건 큰 위로가 되었다. 이곳까지 찾아와 주는 발걸음 자체가 예의였다. 

  그러나 아빠의 이상한 성격은 어디 가질 않아서 술을 거하게 자시고는 외삼촌에게 '본인이 네 누나에게 얼마나 잘했는지'를 떠벌렸다. 다 자기를 떠나서 이렇게 잘못된 거라고 했다. 자기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고, 엄마에게 얼마나 많은 패물을 주었는지(대체로 과장되어 있다), 당신의 누나가 본인을 얼마나 괴롭게 했는지를 얘기했다. 중간중간 아주 달콤한 말로 (외삼촌을 가리키며)"내 말 들어줄 수 있는 처남은 당신뿐이잖아." 하며 외삼촌을 앞에 둘 뿐이었다. 다른 외삼촌들은 방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입구를 서성이며 눈치를 보았다. 외삼촌과 큰 숙모가 이제 좀 가시라고 할 때서야 아빠는 집으로 가셨다. 

  그때 난 다행히 서울에서 온 친구의 조문을 받고 있어 아빠를 상대하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내가 아빠에게 이래라, 저래라 했다면 아빠 입장에서는 그게 또 예의가 아니었을 것이다. 더불어 아빠의 비위를 맞추느라 절절 매고 있었다면 상을 당한 나 자신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을 것이다.

  


Image: Photo by Brett Jorda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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