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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 Oct 15. 2022

You're not bad, You're in pain

아버지와 아버지 애인 모시고 제주여행 (끝)

  혹여나 '성격 장애'라는 진단이 오인되거나 남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상담에서 진단을 활용하는 이유는 적확한 치료를 신속하게 개입하기 위해서이고, 나의 아버지에게 이런 진단명을 생각해본 것은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가벼운 우울감을 가지고 살긴 하지만, 부모를 이해하기 전까지 내 삶은 더욱 어둡고 무거웠다. 어릴 때 해외로 입양된 사람들이 부모의 끈을 더듬더듬 찾아가는 걸 가끔 보면 부모를 이해하는 일은 곧 나를 이해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상담을 받으면서 나의 이상한 아버지와 어린 어머니를 이해해보는 작업을 많이 했고, 내 입장에 대해서도 많이 공감받았다. 지금까지는 세 명의 상담 선생님을 만나봤는데 가장 오래 상담받았던 선생님과 진행했던 60회기 동안, 한 번도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제주 여행을 끝내고서도 만약 내가 상담 선생님께 이 얘기를 했다면 어떻게 말씀하실까 하는 생각도 종종 했다.

  "선생님, 제가 이번에 아빠랑 아줌마 모시고 제주 여행을 다녀왔는데요~"

  "(놀라며) 어머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쉽지 않았을 텐데..."

  "아빠에게 잘해드리고 싶었거든요. 엄마도 없는 마당에 뭐 이판사판이다 이런 심정으로..."

  "또 아무렇지 않게 말하네~ 잘해드리고 싶었다는 게 어떤 마음이었어요?"

  "그냥 아빠가 제주도 가보고 싶다고 너무 여러 번 말했었고... 저도 이제 회사 계약이 끝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돈 벌고 있을 때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빠도 점점 늙어가시니까 다리 힘 있을 때 가는 게 좋지 않을까... 힘들 거라고 각오는 했는데요, 그래도 좀 힘들었어요."

  중간 생략. 아마 어떤 게 힘들었는지 차근차근 물어보셨을 것 같다.

  "경미 씨가 경미 씨 입장에서 어떻게 하고 싶었다, 그런 게 중요한 거지. 아빠가 이상한 사람이든 아니든 경미 씨가 해주고, 해 보고 싶었던 거잖아. 아빠가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겠다, 내가 아빠 모시고 가보고 싶으니까 가 보겠다. 그런 결정이 참 용기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말을 하시면 난 아마 또 힘을 얻고 다시 내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용기를 또 다른 내담자에게 불어넣어주는 상담자로 지낼 수 있지 않을까.


   good 또는 bad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법은 상담하면서 더 많이 배우게 되었다. 영화에서 입체적인 인물 묘사를 보면 어느 누구도 미워할 수 없듯 나도 아빠를 나쁜 사람이라거나 좋은 사람이라고 함부로 정의할 수 없었다. 아빠의 고통을 가늠할수록 내가 받아들이고 넘길 수 있는 부분도 커졌던 것 같다. 아빠의 성격이 저렇게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짚어 가다 보면 마음이 아렸다. 아빠는 나쁜 게 아니라(not bad) 고통 속에(in pain) 있었던 거지. 

  영화 <여인의 향기> 대사였던 이 말은 내담자에게도 적용이 가능해 아무리 이상한 행동이나 인지 왜곡을 보여도 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려 하였다. 더불어 나 자신에게도 적용이 되어서 나를 나쁜 사람, 좋은 사람으로 구분 지어 생각하는 것도 어색해졌다. 나는 사랑받고 싶었고, 사랑받으려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단히 애를 쓰던 나날이었다. 아빠에게도, 엄마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심지어 직장에서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일을 더 많이 맡고 군소리하지 않기를 목표로 삼았다(하지만 속이 문드러질뿐더러 군소리가 나오게 되어 있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의 범주에는 '잘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어 나는 상담을 마칠 때마다 스스로 내가 '잘했는지'를 많이 물었다. 엄격한 사감 선생님이 나타나 내 생활 구석구석을 트집 잡는 느낌처럼. 누워 있으면 게으르게 왜 누워 있느냐고 뭐라고 하고, 일하고 있으면 왜 그렇게까지 몸 상하게 일하고 있느냐고 뭐라고 했다. 상담이 점차 재미 없어지고 부담스러워졌었다.

  그러나 나라는 상담자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상담자로서 어떤 치료적 관점을 가지고 이 회기에 임했는가를 더듬어보면 '잘했다/못했다'가 아니라 A의 관점, B의 관점, C의 관점으로 조망을 해 볼 수 있었다. '다른 관점의 나'들이 촘촘히 나를 둘러싸서 심도 있게 도와준다. 이런 걸 다뤄보면 어떨까, 저런 부분을 더 탐색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잘하고 싶어 하는 내 마음에 공감하고 격려해주면서. 그러면 정말로 안심이 되는 기분이다.


  여전히 아버지와 아줌마를 모시고 제주도에 다녀온 게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판단은 서지 않는다. 아빠 입장에서는 이 여행이 가슴속에 어떻게 남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아빠는 나랑 같이 공유하고 있는 추억을 많이 잊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구름다리를 무서워해서 잘 올라가지 못했는데, 아빠를 붙잡고 알려달라고 했었다. 아빠가 뒤에서 받쳐주는 게 든든해서 마침내 구름다리를 올라갈 수 있었다. 어느 날은 약과가 너무 먹고 싶어서 아빠에게 먹고 싶다고 했더니 동네의 온 슈퍼, 문구점을 뒤져 약과를 찾아 사주셨던 적도 있다. 지금처럼 식재료 배송이 되지 않을 때였다. 이런 기억은 나에게만 있고, 아빠는 '그런 적이 있었냐.'며 예전에는 곧잘 기억하고 있던 것도 대부분 다 잊으셨다.

  그래서 이번 제주 여행도 어쩌면 아빠에게는 잊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잊히면 잊히는 대로, 생각나지 않는 대로 둬도 좋을 것 같다. 어떤 식으로든 아빠가 고통받지 않고 즐거웠으면 좋겠다. 나도 이 여행을 결정하고 진행했던 나에 대해 그만 탐구하고, 그만 판단하고, 하루하루 주어진 일에 정진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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