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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 Oct 13. 2022

질투

아버지와 아버지 애인 모시고 제주여행 10

  숙소는 제주시의 제주항 근처였다. 저녁을 먹고 잠깐 산책을 하는데 바닷바람이 많이 불어 머리를 묶을 끈을 찾았다. 가방에서 노란 고무줄 하나를 찾아 머리를 묶다가 머리끈이 툭 터졌다. 그냥 바람 맞자, 하고 있는 사이에 아줌마가 머리끈을 하나 건네주었다. 고맙다고 하고 머리를 묶고 있다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내 머리끈을 찾아 아줌마가 준 머리끈을 돌려주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엄마였으면 이렇게 철저하게(?) 머리끈 하나를 주고받는 일이 있을까.

  아줌마가 갖고 온 치약 따로(아빠랑 같이 쓰셨다), 내가 쓰는 치약 따로 놓인 세면대를 보며 만약 엄마가 있었으면 이렇게 여행했을까, 생각했다. 치약 정도는 누구 꺼라고 구분하지 않고 나눠 쓰지 않았을까? 12년여 전에 아빠, 아줌마, 오빠, 나, 넷이서 대마도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2인 1실이어서 나는 여자인 아줌마와 방을 쓴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줌마는 아빠랑 방을 썼다. 오빠와 방을 쓰기 싫었는데 뭐라 주장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때도 생각했다. 엄마가 있었다면, 엄마랑 (여자끼리 편하게) 방을 쓰지 않았을까? 엄마가 아빠랑 자고 싶다고 해도 나랑 쓰자고 징징거렸을 것이다.

  

  아빠가 본인이 얼마나 국내 여행을 '안 다녀본 데가 없는지'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내 나름대로 내가 다녀본 곳을 자랑했다. 아빠가 치악산에 간 얘기를 하면, 난 치악산 옆에 있는 멋들어진 카페에 대해 설명했다.

  "너는 뭐 하느라 그리 좋은 곳만 다니냐?"

  아줌마의 말엔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 의도를 알 순 없었지만 분명 가시 돋친 말이었다. 


  여행 중간중간 몇 보씩 걸었는지 확인하던 차에 내 휴대폰의 걸음수가 아줌마 휴대폰의 걸음수보다 2,000보 정도가 더 많았다. 

  "왜 너는 더 많아?"

  이 얘기는 한두 번 들은 게 아니었다. 가끔 부산에서 등산을 같이 할 때면 들었던 소리였다. 나는 그때마다 '내 걸음이 종종거려서', '화장실을 몇 번 더 다녀와서' 그렇다며 변명 같은 소리를 했다.

  "아까 마라도 여객선 터미널에서 뛰어갔다 와서 그런가 봐요."

  

  플리츠 바지를 입고 설렁설렁 걷고 있을 때도 아빠는 무슨 사무라이냐며 놀려댔지만(애정이라 느꼈다) 아줌마는 내 뒷모습을 보더니 "걸을 때마다 알통이 불룩불룩"이라고 말했다. 꼭 이렇게 트집이나 결함을 찾아야만 속이 시원한 걸까? 물론 난 바지를 걷어올려 장딴지를 내보이며 "아빠 닮아 이렇지!"라고 유머러스하게 응수했다.


  부산에 간 어떤 날에는 왜 저번에 본인에게 인사를 안 하고 갔냐고 나를 혼낸 적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인사를 안 하고 올라갔던가? 아줌마가 그랬다면 그랬을 것 같아서 죄송하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가, 다다음날 틀어놓은 TV 드라마에서 계모가 자녀에게 '인사도 안 한다고, 자기를 무시하는 행위'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나왔다. 아줌마의 모습을 재현하듯 보여주어 약간 민망하면서도 고소한 느낌이었다. 당신의 행동이랑 똑같습니다! 

  아줌마가 나에게 잘해줄 때는 아빠가 옆에 있을 때였다. 아빠가 옆에 있을 때는 밥을 차려주거나 좋은 말을 해주었다. 나에게 선물을 사줄 때도 한두 번 있었는데, 다 아빠에게 잘 보이기 위한 거라고 느꼈다. 늘 아빠 보이는 앞에서만 줬고, 그럴 때마다 흐뭇해하던 아빠 표정을 살피는 아줌마의 모습. 아빠는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진 않았지만 조카의 돌 잔칫날 술에 취해 아줌마에게 '사랑한다, 내가 사랑한다'며 연신 고백을 해댔다. 아줌마의 흐뭇한 표정도 속이 상했다.

  

  계모 밑에서 자란 내담자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냉정해지려고 애썼다. 나랑 동일시하며 이 사람을 못 보면 안 될 텐데, 나를 대입하며 지나친 연민에 빠지지 말아야지, 하며 오히려 거리 두거나 냉정하게 말했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다. 상담자는 좋은 거울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내담자에게 나를 투사하기보다는 그 사람 모습 그대로 잘 반영해주고 싶었다. 본가에 다녀와 계모 눈치를 보며 청소만 계속하고 왔다는 내담자가 있었다. 나는 왜 '굳이' 그래야만 했냐며 타박했다. 왜 그랬을지 충분히 짐작이 갔지만서도 내담자가 눈치 보며 행동했던 게 눈에 선하게 그려져 마음이 아팠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물어보고 공감해주는 게 훨씬 도움이 됐을 것이다. 

  어떤 동료 선생님은 '계모도 얼마나 힘든 자리에 있는지'를 가끔 말했다. 나에 대한 공감 없이 바로 계모 입장부터 설명하니까 정말 화났다. 내 외로움과 괴로움에 대해 알지도 못한 채로 아줌마의 위치를 이해하라는 말은 폭력처럼 느껴졌다. 아빠와 엄마 사이에는 내 존재의 자리가 분명하고, 두 분의 사이가 좋은 것이 결국 나라는 존재도 사랑스러운 존재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아빠와 아줌마의 사이에 낀 나의 존재란 것은 '방해물'이었다. 내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느낌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 집'이 아니라 '아빠 집'으로 불러야 하는 것이 얼마나 내가 갈 곳 없이 느껴졌는지 목이 쉴 때까지 외쳐도 전달될 수 없을 것 같았다.

  때때로 나는 못나져야만 할 것 같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고 볼품없고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아줌마의 질투도 받지 않을 것이고, 아빠의 돌봄 또한 획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난 뭘 못하는 사람, 잘나지 않은 사람이라는 위치를 가지려고 했다. 그러니까 절 미워하지 마세요. 질투하지 말아 주세요. 전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나를 이렇게 생각하자 정말로 사람들도 나를 이렇게 생각하고 무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투사적 동일시'일까?


  내가 나이가 들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의 삶은 아빠의 것대로 두고, 아줌마의 삶은 아줌마의 것대로 두자. 나는 내 삶을 살자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럴 수 있었다. 내가 내 힘으로 돈을 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다. 용돈을 받으면서 지낼 때는 더 아줌마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아줌마의 명품 가방이나 금으로 된 액세서리가 눈에 보일 때마다 마치 '내 돈'으로 그런 걸 산 것 같아 못 견디게 속이 뒤틀렸다. 제주 여행에서 아줌마는 프라다 백을 매고 몽클레르 점퍼를 입고 있었다. 나는 에코백에 인터넷 쇼핑몰에서 산 면 티를 입었다. 저게 아빠 돈이었겠지, 생각하면 또 화가 났으나 어차피 아빠 돈은 내 돈이 아니었다. 아빠의 오락가락하는 감정 기복을 겪으며, 비난을 겪어내는 값이려니 생각하고 넘겼다.



Image: Photo by ryota nagasak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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