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버지 애인 모시고 제주여행 3
아버지와 아줌마는 추석 당일에 김해공항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난 원주공항에서 내려와 이틀 정도 혼자 제주도를 돌아다녔다. 혼자 하는 여행은 무척 즐거웠다. 대중교통도 타고 렌터카도 이용했다. 호스텔에서도 자고 1인실의 작은 호텔에서도 잤다. 가고 싶은 장소에 가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은 때에 먹었다. 카페에 갈 때마다 혹은 자기 전에 미셸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를 읽었다. 이 사람은 정말 솔직했다. 나 자신과 부모의 부끄러운 점까지도 이렇게 글로 써낼 수가 있을까? 아버지가 마약을 했고,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낸 순간에도 경찰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딸에게 구강청결제를 가져오라고 했던 것까지 세상 만천하에 알릴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자신과 아버지를 독립적인 타인으로 분화를 잘 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다고 생각했다.
분화(differentiation)란 보웬의 다세대 가족치료에서의 주요 개념 중 하나다. 부모와 융합되어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부모와 자기를 심리적, 정신적으로 독립적인 개체임을 받아들이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친밀감으로 연결되는 과정이자 상태를 말한다. 대학생들을 상담할 때는 경제적으로 독립한 사람이 많이 없었기 때문에 부모의 가치관을 자기의 것처럼 내사하거나, 부모의 인정을 지나치게 받으려고 하거나 부모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하는 게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후 50대 내담자들을 만났을 때도 부모의 상처를 자신의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어른들을 보면서 부모에게서 건강하게 분화되는 것이 누구에게나 쉽지 않구나를 느꼈다.
아빠가 이상한 말을 하면 내가 다 부끄러웠다. 아빠가 다치면 내가 속상했다. 자식이 다친 걸 보고 화를 버럭버럭 내는 부모들에게 '자기 자식도 아파 죽겠는데 왜 화까지 내셔.'라고 할 일이 아니었다. 내가 다친 것도 아닌데 화가 났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화가 나기도 하는구나. 사랑하면 '하나'라고 느끼는가 보다. 특히나 부모들이 자식을 마치 자신의 연장선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 그로 인한 지나친 간섭과 통제 혹은 의존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혼자 걸으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숙소가 괜찮을까. 돈을 더 써서 넓은 데로 가야 하지 않을까? 너무 좁아서 답답해하시면 어쩌지. 내가 너무 아끼려고 하는 걸까. 나에게 짜증을 내면 난 어떻게 반응할까. '아이고, 제가 미안합니다~'하고 수그리고 들어가야 하나, '그럼 아빠가 직접 예약하든지~'라며 반격을 해야 할까. 아빠가 편했으면 좋겠다. 40년 만에 오는 제주도라는데 재밌었으면 좋겠다. 나는 흥분이 되기도 했고, 불안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암시도 걸었다.
- 너무 만족시키려고 하지 말자. 아빠가 실망하든 화가 나든 힘들어하든 그것도 아빠의 여행이고 아빠의 몫이다.
- 혼자 다 하려고 하지 말자. 시내가 아닌 시골길의 해안도로는 아빠 보고 운전하라고 하자. 그럴 때 나름대로의 성취감과 보람도 있을 거다. 아줌마한테도 뭘 부탁하자. 혼자 땀 뻘뻘 흘리며 우왕좌왕하지 말자.
- 이건 아빠나 아줌마를 위한 여행이 아니다. 나를 위한 여행이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면 내가 후회하기 싫어서 하는 여행이다.
- 지나치게 힘들면 싸우자. 도망치자.
이런 마음의 대비에도 불구하고 실전은 힘들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아빠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상담 비전공 친구는 '경상도 아버지'라서 그렇다고 했고, 상담 전공 지인들은 '자기애성 성격장애'인 것 같다고 했다. 둘 다 맞는 말이었다. 경상도 아버지 특유의 표현 못하고 공감 능력이 다소 떨어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러나 보통의 경계를 뛰어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누구나 특이하고 이상한 점들이 몇 개씩 있기 마련이지만 아빠의 성격은 대체적으로 이상했고(보편적인 수준을 뛰어넘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심한 상처를 주거나 떠나가게 만들었다. 아빠에게 이 세상은 자기를 비추는 거울이었고, 자식도 예외가 없었다.
대화를 할 때는 자기가 아는 정보만 집어 말했다. 대화 흐름에 맞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난 벽에 튕겨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최성원의 <제주도의 푸른 밤>을 들었고, 혜은이의 <감수광> 노래를 들었다.
"혜은이의 <감수광> 노래 진짜 좋다. 우리나라 정서에 딱 맞네. 제주도의 특색도 잘 살리고."
"니 혜은이 아나? 혜은이가 누구랑 결혼했다가 이혼했는데, 결국 누구랑 재혼을 해서......"
노래를 들으며 제주의 감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는데 아빠는 당신이 아는 정보만 읊었다. 아빠가 아는 정보들은 제한적이어서 늘 비슷한 레퍼토리였다. 그리고 마지막엔 꼭 이렇게 얘기하셨다.
"이렇게 대화 잘 되는 아버지가 어딨노. 니는 행복한 사람이다."
말을 시작할 때 대부분은 "너네는 모르제."라고 운을 떼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아빠에게는 남들은 모르고 자기만 아는 정보가 너무 많았다. '계란과 야채를 먹으면 살 빠진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건강, 돈, 일, 여행이다.'와 같은 뻔한 말들을 자기가 연구하고 발견한 거라고 했다. 맛있는 걸 먹고 "아, 또 살찌겠다~"는 말을 하면 "나는 살 빼는 방법을 아니까."라며 남들은 아무도 이런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얘기했다. 이렇게 발견한 건 책을 써서 남겨야 한다고 했지만 자기가 대학 교수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 거라고 했다. 이상한 논리였다.
"아빠. 책 써 봐. 발톱에 손을 베여도 살아남는 법, 여행할 때 체중계를 가져오는 이유 같은 거 쓰면 흥미롭지 않겠나."
난 장난으로 응수했다. 여행 중에 발 씻다가 발톱에 손이 베인 게 웃겼고, 어떤 어플에서 체중을 매일 재면 현금처럼 쓸 수 있는 포인트를 주기 때문에 제주까지 체중계를 들고 온 게 웃겼다. 무엇보다 아빠의 포장된 자기상, 이상화된 자기의 모습을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아침마다 프로폴리스를 먹기도 하고 아빠와 아줌마에게도 주었다.
"니는 내 말 하나도 안 듣는데 이거 하나는 듣네."
당신이 나에게 영양제를 먹으라고 했기 때문에 내가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별로였지만, 자기 말은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전제도 싫었다.
"니가 대학원 갈 때 S 대학으로 갈려고 하대? 근데 내가 Y대로 가라고 했다 아이가. 우리나라는 학벌 사회거든."
대학원을 어디로 갈까 고민하고 있을 때 아빠는 Y대가 더 낫지 않겠냐고 했고, 최종 판단으로 나도 Y대로 진학하였다. 아빠에게는 그것도 다 자기가 '시켜서', 자기가 '만들어서' 그런 거라고 했다. S대를 갈려고 하지도 않았고, 정말 고민의 시작 단계였을 뿐인데 아빠는 자기가 이끈 것처럼 말했다. 아빠에게 이 세상은 아빠가 만든 것이었다.
아줌마가 없이 아빠와 둘이 있을 때는 은밀하게 이런 말도 했다.
"내가 아줌마를 이용하는 거다. 한글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내가 이용하고 헤어지면 그만이지."
처음에는 이 말을 나를 위로하는 말이라고 받아들였으나 이게 아버지라는 사람 자체를 말해주는 말이었다. 이런 생각은 자식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빠에게는 자신의 사업을 물려받기를(자신을 재벌기업의 총수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정서적으로 본인을 지지하고 위로해주기를 원했다. 타인은 자신을 위해 이용되는 대상(object)이었다. 내가 당신의 감정을 받아주지 않으면 "니는 똑똑한 애가 이런 것도 못 받아들이나?"며 질타했고 상담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후에는 "니는 상담사라는 애가 사람 말을 받아들일 줄 모르나?"며 비난했다. 아줌마에게는 심지어 권양숙 여사처럼 자기를 보필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가장 많이 하는 레퍼토리는 자신이 얼마나 총명하고 귀여운 아들이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우리 엄마한테 한 번도 대든 적이 없다. 이 놈아, 소리 한 번 들어본 적이 없다. 근데 너희들은......"
이어지는 말은 오빠와 나를 비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자기는 결점 하나 없는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당신에게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를 말했다. 엄동설한에도 찬물에 몸을 담그며 자식 잘 되기를 빌어주셨다고. 어릴 때 이 말을 들었을 땐 '우리 아빠는 귀한 대접을 받았고, 우리 할머니의 지극정성으로 컸구나.'라고 생각을 했지만 상담사가 된 이후에는 아빠가 불쌍했다.
실제로 아빠는 좀 영리했던 것 같다. 관찰력이 좋았고 사람 관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빨리 파악했다. 차남이었던 할아버지는 재산을 몰아 받은 큰할아버지에게 업신여김을 당했던 모양이다. 큰할아버지의 아들, 그러니까 아빠에게는 사촌이었던 사람이 아빠의 형제들을 종 부리듯 부렸고, 아빠는 큰집에 가서 마당을 쓸었다고 했다. 사촌 형에게 종노릇을 했던 심정을 생각하면 정말로 억하고 분했을 것 같다. 심지어 큰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때리기도 했다고 했다.
가난했던 아빠는 돈을 받고 다른 집의 양자로 들어갔다. 입양이 아니라 아들이 없던 집에 제사를 지내주기 위한 양자였다. 아빠는 이를 두고 '자신이 가장 똑똑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갔다고 했다. 일종의 선택(pick)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돈으로 본인이 대학을 진학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무척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고통이었던 일들을 자기의 우월성으로 포장시킬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라고 가끔 생각한다.
폭력적인 가정환경과 궁핍했던 경제적 상황에서 자라온 아빠를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마저 어린 아빠에게 의지했던 것 같았다. 아빠를 양자로 들여 돈을 받아 당장의 살림살이를 살았을 것이고, 집안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아빠에게 의논했다고 했다. 아빠는 해결책을 제시했고, 돈을 부담했다. 이는 엄마와 결혼한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할머니, 할아버지, 큰아버지, 고모, 작은아버지네까지 아빠의 돈이 안 가는 데가 없었다. 엄마와 매일 싸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즉 아빠는 자기의 가족에게서 분화되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가 상처가 많으신가봐요."
분석을 받았던 나의 상담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상담을 받을 때 난 아버지와 헤어질 수가 없었다. 당시 아버지는 자기가 원하는 상황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놓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는 이상화시킨 자기상 하나 믿고 터무니없는 투자를 했었고, 나중에 들어봤을 때 돈을 벌 수 있는 제대로 된 근거는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모든 게 미신처럼 들렸다. 자기가 똑똑하기 때문에, 자기가 사주가 좋아서, 운이 자기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뭐가 파란불이 오고 뭐가 빨간불이 오면 오를 거라고 했다. 돈을 다 날린 아버지는 나에게 아무 설명 없이 생활비를 보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당시에 아빠가 망했는지도 몰랐다) 시발년, 쌍년, 지 엄마랑 똑같은 년, 욕을 퍼부었다. 밤마다 그랬다. 상담 선생님은 아빠의 번호를 차단하라고 했다. 난 그럴 수가 없다고 했다.
"태풍이 오는데 비바람을 다 맞고 있잖아요. 창문을 닫아야죠. 문을 잠궈야죠."
"영원히 열 수 없으면 어떡해요?"
"태풍이 잠잠해졌을 때 열면 돼요. 열 수 있어요. 경미 씨는 지금 우산도 없고 비옷도 없어. 부모 자식은 그렇게 쉽게 헤어지지 않아요."
이미 12살 때 엄마와 헤어진 경험이 있어서 아빠와 헤어진다는 건 나에게 죽음(=생존의 불가)과 다름없었다. 그냥 태풍의 한가운데서 죽고 싶었다.
"이제 경미 씨가 어른이에요."
그 상담 회기가 있고 몇 주 후, 아버지의 번호를 차단했다. 아빠가 쫄딱 망해 채권자들이 집에 닥치는 시기였다. 아빠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엄습했고 공포였다. 그렇지만 내가 살기 위해 차단했다. 아빠와 헤어지는 것이 살 수 있는 길이었는데 도리어 아무도 나를 구해줄 수 없는 어두운 외딴섬에 고립된 것 같았다. 파도도 높았다. 그렇지만 난 아빠의 대상(object)이 아니라 내 인생의 주체(subject)가 되고 싶었다. 이때가 아버지로부터의 나의 분화의 세 번째 단계였다. (첫 번째는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생활권이 분리되었을 때, 두 번째는 직장을 다니며 경제적으로 분리되었을 때라고 생각한다. 분화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