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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 Oct 04. 2022

제주마음샌드2

아버지와 아버지 애인 모시고 제주여행 2

  조카가 태어난 이후에는 사랑에 빠져버려서 컴퓨터, 휴대폰 배경화면에 사진을 도배해놓고 매일 밤 영상을 보고 잔다. 당장이라도 얼싸안고 보드라운 볼에 입을 맞추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서 괴로워한다. 조카도 이렇게 사랑하는데 자식은 얼마나 좋을까?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이번 제주 여행에서 또 의문이 들었다. 이 사람은 날 사랑하긴 하나? 아니, 날 딸로는 생각을 하는 걸까...?

  제주마음샌드 사건(?)도 그렇다. 남의 딸에게는 뭘 주려고 하는데 나에게는? 어딜 가든 아줌마 사진을 찍어주기 바빴다. 아줌마의 목욕물은 받아주지만 내 목욕물은 받아주지 않았다. 아줌마의 손은 잡아주지만 내 손은 잡아주지 않았다. 귤 모양 모자가 귀엽다며 아줌마에게 사줄까? 물어봤지만 나에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아줌마의 등은 밀어줬지만, 내 등은.... 이건 미리 사양하겠지만 도대체 '나는?'이라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여행이 지나갈수록 점차 사랑받고 싶어졌다.

  레이스 끈이 달린 모자를 썼을 때 "예쁘다. 어디서 샀노?" 물어보는 거엔 울화가 치밀었다. '왜! 아줌마 사주게?' 이런 말이 불쑥 나올 것 같았지만 또 싸움이 될 것 같아 "그냥 인터넷에서 샀지."하고 말았다. 엄마 생각도 났다. 엄마는 내가 (엄마 기준에) 예쁜 옷을 입고 가면 어디서 샀는지를 기어코 물어댔고, 나는 그 자리에서 옷을 벗어주거나 가방을 주고 온 적이 종종 있었다. 심지어 식당에 갔을 때도 맛있는 걸 자식 앞으로 밀어주는 대신, 엄마는 자기 앞으로 더 가까이 가져갔다. 난 정말 사랑받고 싶었다.

  내가 12살 때 엄마랑 아빠가 헤어졌고, 14살 때부터 아빠, 아줌마, 오빠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 아빠와 아줌마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으면 방에서 나가기가 힘들었다. '아줌마 싫으면 나가. 그냥 나가 디지든가 말든가.'라는 말을 중학생이 들으면 생존에 위협이 든다. 엉엉 울며 집을 나갔을 때 '난 고등학교도 못 가는 건가?' 생각했다. 다시 돌아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못했어요, 빌고 아빠 밑에서 살기로 결정했을 때부터는 눈치가 보였다. 아빠와 아줌마 사이에 내가 끼어든 느낌. 그때부턴 '우리 집'이라고 하지 않고 '아빠 집'이라고 불렀다. 

  상담자로 살아가면서 상담을 받았다. 내가 얼마나 깨어진 항아리 같은지, 그래서 얼마나 사랑받고 싶은지, 항아리에 담아도 담아도 부족한 것 같은 느낌들을 고백했다. 선생님에게 슬쩍 물어본 적도 있다.

  "선생님은 저 사랑하세요?"

  상담자일 때는 내담자에게 사랑을 주지 말라고 배웠다. 사랑받으려고 오는 내담자에게 사랑을 충족시켜주기보다는 사랑을 원하는 자기의 모습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배웠다. 그게 상담자의 역할이라고. 그래서 예쁨 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내담자들에게는 거울처럼 '사랑받고 싶군요.'라고 반영만 해주었다. 그런데 내 상담 선생님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사랑하지! 근데 난 종지예요. 경미 씨처럼 그릇이 크지 않아. 난 간장 종지여서 사랑을 많이 못 줘요."

  양은 섭섭했지만 사랑하긴 한다기에 안심했다. 선생님은 자꾸 내가 사랑이 크다고 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 받고 싶어요.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잦아든 건 엄마가 돌아가시면서였다. 사랑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 중 한 명이 죽고 나자 오히려 사랑에 매달리는 게 어리석게 느껴졌다. 잔혹한 현실도 알았다. 회사에서 가족 돌봄 휴가를 주지 않았고, 친한 친구가 장례식에 오지 않았을 때 내 고통과 외로움, 슬픔은 혼자서 처리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삶에는 혼자서 처리해야 하는 영역이 필연적으로 있음을 배웠다. 어떤 누구도 날 도와줄 수 없는 영역. 더 이상 사랑받으려고 '애를 쓰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만 집중했다.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운동을 했다. 점차 편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아빠와 아줌마 사이에 끼니 불과 3박 4일이었는데도 나는 다시 깨진 항아리가 되었고, 목이 말랐다. 내가 이 사람들 사이에서 학창 시절을 내내 보냈으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는 자기 이해와 자기 연민의 시간도 부러 가졌지만 며칠간 계속 우울했다. 


  내가 옆에 있는데도 계속 아줌마를 챙기고, 아줌마의 안위를 신경 쓰는 아빠를 봤을 때 속이 뒤틀렸다. 돈을 내고, 운전을 하고, 식당을 예약하는 무수리 역할이 나였다. 여행 막바지에 아빠가 "즐거웠나?" 할 때 나는 큰소리로 "네!!" 대답했는데 "자야, 즐거웠나?" 다시 물었을 때 아빠가 나에게 물어본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런 소외감을 십여 년 느꼈던 것이다. 나는 속할 곳이 없었다.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깨진 항아리여서 도망가면 어떡하지 늘 걱정했다. 

  이제 내가 어른이었다. 더 이상 이런 아버지여서 내가 고통 속에 살았다고 호소한들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상담 선생님이 나 스스로 나를 챙겨야 한다고 말했을 때는 정말로 화났다. 그럼 저는 평생 저만 챙기고 못 받나요? 타인에게서 받고 싶어요. 타인에게서 받는 게 얼마나 귀한 건지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다시 한번 화났다. 이미 귀한 거 알고 있거든요? 입에 바른 말씀만 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만 선생님의 말

씀은 이론적이고 이상적이면서도 가장 현실적이었고 나는 다시 한번 내돈내산으로 제주마음샌드를 사서 내 입에 넣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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