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아픔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매를 많이 맞아서 생긴 아픔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유리 조각에 찔린 곳을 바늘로 꿰맬 때의 느낌도 아니었다. 아픔이란 가슴 전체가 모두 아린, 그런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비밀을 말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죽어야 하는 그런 것이었다.
이 문장은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주제 마우루 지 바스콘셀로스 지음, 박동원 옮김, 동녘)에서 가져온 문장이다. 나이 마흔 가운데가 넘어 다시 읽은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다. 5살 주인공 제제. 동네에서 온갖 못된 장난을 치는 아이다. 그러나 같은 또래에 비해 똑똑했던 아이다. 또한, 너무도 일찍 철이 든 아이였다. 친아버지를 부정하고 새로 얻은 친구 뽀르뚜가를 친아버지로 여기는 제제. 그를 잃은 슬픔은 마치 인생을 다 살아본 사람의 슬픔같이 느껴진다.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을 그린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책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다.
아프다는 것이 무엇일까? 육체적으로 아픈 것과 마음이 아픈 것은 다르다. 보통 우리는 아프다고 할 때 고통스럽다는 것을 아프다고 표현한다. 머리가 아프다, 다리가 아프다 하는 식으로. 아니면 뭔가에 찔려 피가 나거나 부딪혀 멍이 들 때 아프다고 한다. 하지만, 가슴이 아프다고 말할 때는 그런 것과는 다르다. 가슴,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고통이라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인다.
어느덧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가슴이 아프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어른들이 가슴이 아프다고 하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하지만, 이 나이쯤 되니 이제 나도 그 말뜻을 알 것 같다. 가슴이 아픈 일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아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일 것이다. 내 나이쯤 되면 가족 가운데 누군가를 먼저 떠나보내는 일을 겪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걸 어떻게 표현할까? 가슴이 아리다는 것 말고 달리 표현할 말이 없는 것 같다. 가슴이 너무도 아리고, 저미어 숨쉬기조차 힘들고, 팔과 다리는 힘이 풀려 뭔가를 움켜쥐거나 그 자리에 서 있기도 힘이 드는 상황, 바로 그것이 아픔이란 걸 깨닫는다.
가슴이 아픈 걸 깨달아 가는 길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같다. 그래서 언제나 자식은 나이를 먹어도 부모 눈에는 어려 보이는 건가. 60이 되고 70이 되어도 부모 눈에는 어린아이로 보이는 이유가 아직 부모보다 아픔을 덜 겪었기 때문일까. 아픔이란 것도 쌓이고 쌓이면 더는 쌓아둘 데가 없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수많은 아픔을 겪고 참고 견디며 산 노인들은 모든 것을 초월한 듯 보인다. 그런 게 인생이란 생각이 든다.
늙어간다는 것은 결국, 아픔을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과정이란 생각이 든다. 더는 아릴 곳도 없을 때까지 아픔을 받아들이고 가는 길, 그것이 삶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