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의 독서

by 이광

뭐든지 한창일 때보다 시작할 때가 사람의 감정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것 같다. 사랑이 그랬고, 여행이 그랬고, 일이 그랬다. 우리가 하나의 계절을 맞이하고 보내는 일도 그렇다.


봄기운이 아지랑이처럼 감질나게 피어오를 때 봄과 무관한 사람이 되어 뭔가를 진득하게 앉아서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창문을 경계로 봄과 대치한 채로 뭔가에 집중하려는 것은 사람을 외롭게도 하는 일이다. 그래서 애써 봄을 외면하려 하는 것은 무모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봄이 깊어 갈수록 금세 터질 것 같은 꽃망울과 여린 새순들이 머릿속에서 자꾸 떠올라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기 마련이다. 그럴 때면 점심시간에 잠깐 밖으로 나와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봄의 정취라는 것을 맛볼 수 있다.


오늘 점심때 보았던 나뭇가지에 밥알처럼 돋아난 새순과 담장 위에서 노란 화관을 쓰고 있는 개나리와 촛불처럼 성스럽게 피어 있는 하얀 목련은 내 마음을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롭게 만들었다. 이러한 풍요로움 때문에 봄이 되면 나도 모르게 설레는 것일 테다.


어제저녁 미사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벚꽃을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벚꽃길을 밝히는 조명이 잘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밤에는 낮보다 감각이 산만하지 않아서 소담스럽게 피어난 벚꽃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것도 밤에 벚꽃을 구경하는 이유라면 이유라 할 수 있겠다.


벚꽃 사진을 찍으면서 흥겨워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벚꽃길을 걷는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만개한 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봄이면 꽃만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꽃처럼 피어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화면에 찍힌 하얀 벚꽃을 보고 있으니 왠지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 덕분에 봄밤 벚꽃길을 쉬 돌아서지 못하고 봄의 정취를 만끽하며 한 시간 넘도록 걸었다.





읽고 싶은 책들을 적어 둔 목록은 늘어만 가는데 읽을 시간은 줄어들고 읽어 내는 속도도 점점 더뎌지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시간이 점점 행복해지고 있는 것 같다. 주말에 아침을 먹자마자 책을 펼치고 읽다 보면 금세 점심 먹을 시간이 되고, 점심을 먹자마자 다시 책을 펼쳐 읽다 보면 어느새 밖은 땅거미가 지고 붉은 기운의 차오름으로 저녁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잠자리에 들 때도 책을 내려놓기가 아쉬울 정도로 하루 종일 어떤 책에 빠져있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번 주에 두 권의 책을 읽었다. 한 권은 일본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고, 다른 한 권은 포르투갈 작가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이다.


내게 익숙한 일본 작가는 <노르웨이의 숲>의 무라카미 하루키와 <인간 실격>의 다자이 오사무 정도이다. 전부터 읽으려고 했던 <불안의 책>을 대출하러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보고 망설임 없이 두 권을 들고 집으로 왔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은 내가 예전에 불면증으로 고생할 때의 내 모습을 보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어서 쉽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현존재로서의 불안과 공허한 삶의 형이상학적 고뇌가 6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책에서 쉼 없이 서술되어 있다.


리스본의 회계사무원 베르나르두 소아르스가 말하는 책 속의 몇 문장은 다음과 같다.


- 내 안의 모든 것은 항상 다른 무엇이 되려 한다.


- 나는 어떤 대상을 이해한 후에야 그것을 사랑하거나 증오할 수 있다고 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발언만큼 거짓인 동시에 의미심장한 발언을 알지 못한다.


-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나의 상실은 알 수 없는 운명으로 태어나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라, 파도가 높이 몰아쳤을 때 바닷가에 생겼다가 다시는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는 물웅덩이 같다.


- 우리가 했던 모든 일이 사랑이라면 죽어도 괜찮다.


-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눈으로가 아니라 삶으로 읽는 소설 속 사건이나 에피소드처럼 생각하기. 이런 태도를 취할 때에만 날마다 일어나는 나쁜 일과 변덕스러운 사건을 이겨낼 수 있다.


- 도라레스 거리에도 우주가 있다. 신은 이곳에도 경계 없는 삶의 수수께끼를 마련해놓았다. 그러므로 비록 바퀴와 나무판자들 사이에서 추출한 나의 꿈들이 마차와 상자들이 있는 풍경처럼 초라할지라도, 여전히 그것들은 내가 가진 것이고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세 명의 빈집털이범이 폐가가 된 ‘나미야 잡화점’에 숨어들어 우연히 과거에서 보내온 고민 상담 편지를 받고 그 사람에 대해 고민하면서 성심껏 답장을 써 주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전개가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복잡한 인물들이 나미야 잡화점과 아동복지시설인 환광원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된 짜임새가 아주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소설 속에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진지하게 뭔가를 고민해 본 적이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어.” 이 문장을 읽고 한동안 문장의 마침표에 시선을 멈추고 있어야 했다. 그러면서 다른 누군가를 위해 진지하게 뭔가를 고민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봤다. 아마도 이 세상에 고민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순간에도 나름의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든 결정하고 삶을 묵묵히 살아갈 것이다. 그 고민이 해결되었건 아니건 관계없이. 그러면서도 그들이 스스로를 사랑하고 칭찬하는 일만큼은 잊지 않기를 바란다.


책을 읽고 난 후에 뒤표지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소설의 목록을 볼 수 있었다. 작가를 소개하는 말에도 열 편 정도의 대표작들을 나열하고 그것도 모자라 ‘–외 다수’라는 말이 덧붙여있었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 많은 소설을 써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을지 생각해 보았다. 오늘 아침에 펼쳐 든 책에서 어느 스님이 하는 평범한 말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뭐든지 자신이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 만큼 결과가 나온다는 의미를 되새기며 내 삶을 환기하게 된다.





방금 SNS에 들어갔더니 스마트 스토어를 운영하시는 할아버지께서 댓글을 남겼다. ‘감동입니다’ 지난번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댓글처럼 역시 이번에도 짧은 문장이지만 여운은 결코 짧지 않았다. 나는 행복한 봄날 보내시라는 댓글을 남겼다. 할아버지에게 얼마만큼의 감동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로 인해 글을 써서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 보이는 작업이 참으로 고맙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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