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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a Jun 18. 2022

골목길

저녁 어스름이 내리자 산책에 나섰다. 바닷가 산책로로 가는 길에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던 골목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오늘은 문득 골목 안이 궁금했다. 골목길에 들어서자 호기심도 차올라 찰랑거렸다. 조금 걸어 들어가니 공터가 나온다. 골목 안에 공터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쪽에는 정갈하게 가꾸어진 텃밭이 있다. 상추, 고추, 그리고 가지가 일정한 간격으로 자라고 있었다. 


-작지만 야물어 보이는 고추 두어 개를 따고 유달리 싱싱해 보이는 상추 몇 장 뜯어다가 수돗물에 살짝 헹군 다음 상추 한 장을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그 위에 밥 한 숟가락을 올리고 매워 보이는 고추를 어머니께서 고추장과 된장으로 만들어 놓으신 쌈장에 조금 찍어 밥 위에 올리자 다른 반찬 없이도 여름을 충만히 즐길 수 있는 상추쌈이 완성되었다. 군침이 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상추쌈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거린다. 관자놀이가 즐거워 춤을 추고 웃음이 절로 나온다. 

가지도 몇 개 따다가 세로로 반씩 자르고 다시 가로로 먹기 좋게 여러 번 잘라 살짝 쪄낸다. 간장과 참치액젓, 설탕을 조금씩 넣고 끓인 물을 식힌 후 찐 가지를 넣어 냉국을 만든다. 입맛 없는 여름철에 시원한 가지냉국에 밥 한 숟가락 말아먹으면 진수성찬 부럽지 않고 냉장고 안에 있는 다른 반찬들은 여간해서 바깥 구경하지 못한다.- 


잠시 텃밭 옆에 서서 눈으로 여름을 포식하고 돌아서자 이미 배가 빵빵해진 느낌이다. 


고양이 두 마리가 서로 2미터쯤 떨어져서 앉아있었다. 내가 다가가도 움직이질 않는다. 골목 터줏대감인 게 틀림없다. 순간 내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오른손을 반쯤 들어 올리고 '안녕'하고 인사를 건넸다. 고양이들은 눈만 마주쳤으면 됐지 굳이 인사까지 하느냐는 식으로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나는 그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조심스럽게 고양이들 사이를 지나쳤다. 


골목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니 기다란 담을 넘어 아름다운 자태로 늘어뜨린 능소화가 바람에 하늘거리고 담벼락에는 우아하게 핀 수국들이 두런대며 서있다. 몇 걸음 더 들어가자 하얗게 칠해진 담장 위에는 분홍 넝쿨 장미가 늘어뜨려져 있다. 바닥에 떨어진 장미 두 잎을 집어 들어 헐렁한 윗주머니에 넣었다. 집에 가져다가 책 속에 넣어 둘 생각이다. 이양이면 시집 속에 넣어두어야겠다. 그러면 시에도 장미향이 베어들 것이다. 장미향이 베어든 시를 읽는 나는 생각까지 장미 향이 나는 사내인 것이다.


골목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어느 집의 뜰이었다. 낮은 담장으로 들여다 보이는 뜰에는 갖가지 꽃들이 빼곡히 자라나고 있었다. 꽃뿐 아니라 뜰 한가운데에는 내 키만 한 동백나무 두 그루가 보기 좋게 자리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그보다 키가 큰 무화과나무가 서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뜰을 잘 가꿀 수 있을까. 집주인이 식물들을 가꾸며 뜰에서 보냈을 시간을 생각해보니 보통 정성이 들어간 게 아니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집주인이 궁금해졌다. 무엇보다도 뜰을 아름답게 가꾸었을 집주인의 손이 궁금했다. 그리고 집주인의 웃는 얼굴은 아마도 연꽃처럼 맑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의 뜰은 계절이 바뀌어도 그 계절에 어울리는 꽃들이 자라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뜰이 계절에 따라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서라도 다시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늘 골목 안으로 들어와 보지 않았다면 지금껏 그랬듯이 앞으로도 입구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골목 안쪽도 삭막할 거라고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발걸음이 향하는 대로 들어왔다가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가득 안고 가는 기분이다. 골목 안에는 누군가 정성껏 가꾸어 놓은 텃밭과 담장 주위에 심어 놓은 꽃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풍성해지게 하고 있었다. 

20분 정도 골목을 구경하고 돌아 나가는 내 발걸음은 가볍고 마음은 따뜻하고 풍족하다. 








골목길에서 1


























골목길에서 2























골목길에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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