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06. 보스턴
우리는 펼쳐놓았던 짐들을 다시 배낭에 욱여넣었다.
'배낭의 무게는 전생 업보'라더니.
이 무게를 보니 우리 전생이 꽤나 복잡했나 보다.
원래 남편과 나는 일주일쯤의 여행이라면 작은 백팩 하나로도 충분한 미니멀 여행자였는데,
사계절을 모두 겪어야 하는 긴 여정에 아이까지 함께하니, '혹시 몰라' 챙긴 것들이 많아졌다.
결국 그 '혹시'를 위해 짊어진 무게가, 고스란히 우리의 어깨 위에 업보처럼 올라앉았다.
“뿡뿡아, 오늘은 보스턴이라는 곳으로 갈 거야~”
오늘도 이든이는 뿡뿡이와 이야기를 한다. 뿡뿡이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내가 대신한다.
가끔은 아이가 이렇게 인형과 대화하는 모습이 짠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건 아이의 상상의 세계인 것이라고. 아이는 이런 연극을 통해서 또 다른 세상을 그려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나저나 엄마 아빠는 땀범벅인데 뿡뿡이 앞에 떡하니 손선풍기를 틀어놓은 모습을 보니
기가 막히면서도 귀엽다.
우리를 보스턴으로 데려다 줄 Ourbus를 타러 가는 길
출근시간이라 그런지 전철 안이 인산인해였다.
이제는 아무 데나 털썩 주저앉는 이든이. 며칠 강행군을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 네가 앉는 곳이 너의 의자란다." 마음속으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뉴욕에서 보스턴까지 4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창 밖의 하늘은 변화무쌍했다.
하늘은 맑다가도 갑자기 소나기 뿌리고 또다시 맑아졌다.
날씨가 내 감정만큼이나 풍부한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났다.
미국에서 가장 먼저 생긴 전철이라더니, 보스턴의 전철은 정말 앤틱 그 자체였다.
1800년대에 다니던 전철이 아직도 그대로 운행 중인듯한 기분.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깨를 짓누르던 배낭의 무게가 순간 가벼워진 듯 느껴졌다.
과거와 현재와 겹쳐지는 그 낯선 떨림 속에서 우리는 오늘의 집을 찾아갔다.
우리의 집은 2층, 3층짜리 주택들이 다닥다닥 모여있는 관광지와는 다른 조용한 분위기의 동네 한가운데 있었다.
숙소를 찾아 걸어가면서 '이런 동네에서 살면 어떨까?' 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다.
아마도 이번 여정에서는 호스텔이나 호텔보다는 에어비앤비에서 많이 묵게 될 것이다.
집 꾸미는 걸 좋아하는 나는 집마다 나라마다 다른 인테리어 구경하는 것도 나름 쏠쏠한 재미를 느낄 것 같다.
이 것 자체로도 여행의 한 조각이 되지 않을까. 우린 과연 몇 곳의 집에 머물게 될까?
이른 아침부터 이동으로 지친 오늘 하루,
오늘은 특별한 스케줄 없이 집 근처 놀이터와 마트에 다녀오 기로하고 집을 나섰다.
근데 집을 나서자마자 동네를 뛰어다니는 토끼 발견! 풀도 없는 아스팔트에 토끼가 뛰어다니다니!
"엄마! 토끼야!"
이든이는 신이 나서 내 핸드폰을 들고 토끼를 쫓았다.
한참을 그렇게 따라다니더니, 결국 남은 건 이든이의 발 사진 수십 장.
아 너무 귀엽잖아.
토끼를 한참 쫓다가 다시 지도를 보고 마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번에 마주친 곳은 '수영장'과 ‘물놀이터’였다.
입장료도 없고, 시민을 위한 열린 공간이었다.
수영복이 없어서 수영장엔 들어갈 수 없었지만 물놀이터에서 놀 수 있었다.
하늘은 그날따라 영화처럼 맑았고,
아이들은 옷을 입은 채로 주저 없이 물속을 뛰어다녔다.
이든이는 신났고 우리도 신났다.
하버드 대학교를 보러 오겠다고 정한 도시였지만,
우리에게 보스턴은 공부나 명문대보다
이렇게 우연히 마주친 영화 같은 하루로 더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다음 날, 우리는 하버드 대학교로 향했다.
보스턴에는 MIT, 버클리 음대 등 이름만 들어도 아는 세계적인 대학들이 몰려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가보고 싶었던 곳은 바로 ‘하버드’.
“뿡뿡아~ 우린 오늘 학교라는 곳에 갈 거야~”
“학교엔 왜 가는데?”
“똑똑해지려고 가지!!!”
늘 그렇듯 동생 뿡뿡이와의 대화는 이든이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창구다.
근데 학교 가면 정말 '똑똑해' 지나?
하버드 캠퍼스 안으로 들어서니,
햇살 가득한 조용한 듯 활기찬 공기, 붉은 벽돌 건물들과 푸르른 잔디밭, 걷기만 해도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져 신났다.
존 하버드 동상 앞에서 가족사진을 찍고, 존 하버드 동상 발을 만지는 ‘관광객 코스’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남편 왈,
“저 발에 하버드생들이 오줌을 그렇게 쌌다더라.”
그래서 그는 정중히 만지는 ‘척’만 했다고 한다.
'이렇게 높이 어떻게 오줌을 싸지...?'
하버드 하면 옛날 옛날 김태희와 김래원이 주연으로 나왔던 드라마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가 생각나는,
나는야 옛날사람^^
미알못인 우리 부부는 그냥 스쳐 지나가려고 했던 채광이 너무 좋았던 하버드 아트 뮤지엄
이든이가 "트로피"라고 부른 조형물을 봐야겠다고 해서 들어가 봤다.
"엄마! 이 트로피지?"
"아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네"
하버드에서 한참을 시간을 보낸 후 점심을 먹으러 자리를 옮겼다.
그렇지만 졸음님이 이든이를 급습했다.
한 입 제대로 먹기도 전에 스르르~ 눈꺼풀이 내려앉고, 결국 포크도 내려놓고 테이블에 엎드려 잠이 들어 버렸다.
어쩌지?
결국 우리는 잠든 아들을 들쳐 없고 다시 하버드 교정을 찾았다.
넓디넓은 잔디밭 한편, 햇살은 포근하고, 바람은 선선했다.
하버드 교정에서 낮잠 자봤니?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목표일 수도 있는 이곳이 우리에겐 잠든 아이를 위한 포근한 휴식처가 되어주었다.
아이와의 여행은 늘 그렇다.
계획대로 되는 건 없지만, 계획보다 더 특별한 순간들이 생긴다.
한참이 지나 잠에서 깬 아들과 함께, 보스턴의 유명한 카페 TTATE에 들렀다.
아~ 카페.
커피 한 모금과 유명한 피스타치오 크로와상 한 입.
입안에 퍼지는 고소한 맛에 오늘 하루의 피로가 스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문득, 생각했다.
카페는 여행자들의 안식처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쉴 틈 없이 움직인 하루였지만, 오늘 하루 중에 가장 좋았던 순간은
바로 지금, 분위기 좋은 카페 한편에서 따뜻한 커피 한 모금 마시는 이 시간이다.
MIT를 구경하러 가는 대신, 다람쥐가 뛰노는 동네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트리니티 교회 앞에서 인증샷도 열심히 찍었다.
집으로 돌아오는길 마트에 들러 냉동피자와 아이스크림을 샀다.
그런데 말이지.
냉동피자가 뉴욕 3대 피자보다 맛있게 느껴지는건....정말일까? 착각일까?
셋이 나란히 침대에 기대어 꿀맛 같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매일매일 바쁘게 돌아다니는 여행보다, 이렇게 하루를 '살아보는' 여행이 더 우리다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스턴에서의 마지막 날. 우리는 오늘 저녁 밤버스로 캐나다로 이동한다.
Bounce앱을 통해 찾은 보관소에 짐을 맡기고 보스턴을 떠나기 전 하루를 오롯이 누비기로 했다.
미국 3대 미술관 중 하나라는 보스턴 미술관 앞 잔디에서 한참을 쉬기도 하고
우연히 만난 장미가 만개한 로즈가든에서 우리만의 출사를 즐겼다.
1912년 개장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경기장인 보스턴 레드삭스의 팬웨이 파크에도 들렀다.
하루가 길다 길어.
이제 좀 쉬어가야 겠다 싶어 보스턴 커먼 공원에서 돗자리를 깔고 누웠다.
"아고아고…"
고통의 소리가 저절로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작은 돗자리에 셋이 옹기종기 누워 히히히 웃는다.
햇살과 바람, 소풍 같은 점심, 그리고 이든이의 웃음까지.
공원에서 파는 음식이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맛있어서 그런지… 더없이 행복했다.
오늘의 마지막 코스는 프리덤 트레일.
붉은 선을 따라 걸으며, 미국의 독립 역사를 밟아본다.
무겁고도 웅장한 과거를 지나 우리는 퀸시 마켓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사람, 사람, 사람!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이는 인파에 눌려 결국 방향을 틀어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계획은 바뀌었지만, 이런게 여행의 묘미지.
그리고 밤 11시 50분. 캐나다 몬트리올로 향하는 버스가 제 시간에 오지않아
기다리다 지친 이든이가 잠이 들어버렸다.
내일 아침 몬트리올에 도착할 때 까지 깨지 말아다오~
이제 우리는 세계여행의 두번째 나라 캐나다로 이동한다.
캐나다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