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07. 플로레스, 과테말라
우리는 유적지에는 별 관심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멕시코 툴룸에서 우연히 들른 유적지가 의외로 재미있었다.
그래서 과테말라 플로레스에서는 티칼 유적지를 가보기로 했다.
투어는 대부분 숙소에서 신청할 수 있었고, 가격 차이도 여행사와 크게 나지 않았다.
우리도 숙소 리셉션에서 편하게 신청했다. 비록 숙소는 매우 편하지 않았지만....
8시를 조금 넘긴 시간, 통로 좌석까지 꽉꽉 채운 미니버스가 페텐 호수 앞에서 출발했고
가다 서다를 반복한 후 두 시간이 걸려 티칼에 도착했다.
티칼은 한때 마야 지방 전체를 통치했던 최대 규모의 도시로 전성기에는 10만 명이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기후변화와 가뭄등으로 멸망한 뒤 정글 속으로 사라졌다가 600여 년 만에 탐험가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22개의 신전이 발견됐고, 이는 전체의 30% 미만으로 여전히 발굴 진행 중이다.
현재 개방된 신전은 5번까지 인데, 그중 가장 높은 건 4번 신전이라고 한다.
유적지가 ‘정말 넓고 덥다는데, 오늘 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잠시 스쳤다.
입장하자마자 코아티를 발견했다. 작고 재빠른 발걸음, 호기심 가득한 눈빛.
개미는 무서워하면서 코아티는 귀엽다며 곁으로 계속 다가간다.
도대체 어린이의 기준을 가늠할 수가 없다.
투어는 영어팀과 스페인어팀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처음엔 가이드가 어디까지 함께할까 싶었는데, 결론은 투어가 종료될 때까지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정글 속 길을 인솔하며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얼마 전, 한 미국인이 이곳에서 실종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일까.
가이드의 케어가 유난히 철저하게 느껴졌다.
비가 조금씩 흩뿌리는 숲길, 우리는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종종걸음을 재촉했다.
빗방울에 젖은 흙냄새와 눅눅한 숲의 공기가 폐 속까지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제일 번성했던 시기의 왕이 모셔져 있고 가장 많은 유물이 발견된 1번 신전,
그리고 돌면에 얼굴이 새겨 저 있어 '마스크 신전'이라 불리는 2번 신전.
그 사이에 그란플라자와, 센트럴 아크로폴리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가이드는 한참 동안 설명을 해 준 뒤, 30분의 자유 시간을 주었다.
2번 신전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광장과 신전들이 어우러진 풍경이 꽤나 웅장했고, 숨을 고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광장 한쪽에 전통 의상을 입은 한 노파의 모습을 보며 이곳에 살던 옛 마야 사람들의 삶을 잠시 상상해 보기도 했다. 지금 태어난 게 나은 걸까? 그때가 나았을까?
그때 갑자기 환호성이 터졌다. 누군가 유적지 한가운데서 연인에게 프러포즈를 하고 있었다.
과거의 공간에서 현재의 사랑에 대한 약속이라니.
왠지 그들의 사랑이 영원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투어는 계속 이어졌고, 가이드의 설명도 계속 됐지만
이든이의 관심은 오직 코아티뿐 :-(
나무 사이사이로 보이는 고대의 돌계단은 마치 다른 차원의 문처럼 느껴졌다.
타임슬립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보다.
잃어버린 세계, 잃어버린 가족
Mundo Perdido, '잃어버린 세계'라는 이름을 가진 건축물 앞에 도착했다.
주로 천문 관측과 제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에 올라가야 하는데 이든이가 배가 아프다고 한다.
바깔라르에서부터 이어진 배탈이 아직 완쾌되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남편과 이든이는 화장실 찾아가고 나 혼자 신전의 계단을 오르게 되었다.
돌계단은 매우 가팔랐고, 오르는 모든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렸다. 숨이 턱턱 막혔다..
그렇게 도착한 정상에서 보이는 풍경!
숲 위로 솟은 신전에 올라 정글을 내려다보는 순간, 마치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 멀리 가장 높은 4 신전도 보였다.
이렇게 멋진 풍경을 혼자서만 보니 너무 아쉬웠다.
다시 신전 아래로 내려왔다. 남편과 이든이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화장실을 못 찾았나?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그렇게 한참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남편과 이든이.
투어팀은 이동할 시간이 되었고, 가이드는 “4번 신전으로 가겠다”며
나에게는 그란플라자로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2시 반까지 주차장으로 갈게요.”
시간이 더 지체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나는 맨 처음 약속했던 집합 장소로 가겠다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떠나고 순식간에 혼자가 되었다.
손 선풍기로 땀을 식히며 '이쪽에서 오려나? 저쪽에서 오려나?' 한참이나 주변을 서성였다.
어미 잃은 새가 된 듯,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혼자인 듯한 기분,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었다.
멈춘 시간을 뚫고 마침내 남편과 이든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도감이 밀려들기도 전에 남편은 나에게 왜 투어팀을 따라가지 않았냐고 물었다.
“아니, 헤어진 자리에서 기다리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긴장이 풀리면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알고 보니 화장실은 4 신전 근처였고 남편은 내가 그쪽으로 올 줄 알았나 보다.
남편은 그곳에서 마침 우리 가이드를 만나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랴부랴 온 것이었다.
암튼 그렇게 중단될뻔한 우리의 티칼 투어는 계속되었다. :-) 어쨌거나 해피엔딩~ 휴~
맑아진 하늘 아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어쩌면 하늘이 아니라 내 마음이 맑아져서 더 빛나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신나서 사진을 열심히 찍어댔다.
신전에서 내려오자, 오잉?
뜻밖에도 가이드 아저씨가 그곳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떠난 뒤였다
알고 보니 우리를 기다리신 것이었다.
민폐 손님이 된 듯한 죄송스러운 마음에 서둘러 발걸음을 맞추었다.
집합 장소로 돌아가는 길,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다시 보는 신전은 또 다른 멋짐으로 다가왔고,
길가따라 가며 거대한 세이바 나무도 보고, 나무 위에서 놀고 있는 스파이더 원숭이도 보았다.
뜻밖에도 단독 가이드 투어 받은 셈이었다.
2시 14분, 드디어 약속 장소에 도착.
가이드 아저씨가 아니었더라면 제시간에 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간단한 샌드위치와 시원한 콜라 그리고 맥주로 더위와 긴장감과 배고픔을 해소해 본다.
그리고 3시, 버스는 천천히 플로레스를 향해 출발했다.
차 안은 고요했고, 모두가 땀과 흙, 그리고 하루의 여운 속에서 묵묵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늘 하루, 우리 모두 수고했다.
여행은 늘 변수와 해프닝으로 채워지지만,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게 아닐까.
그래도 해프닝이 너무 자주 일어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