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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루 Jun 19. 2024

[에세이] 회사 못 다니겠어요

#2. 엄마는 모르게

[에세이] 회사 못 다니겠어요


스물아홉, 지방에서 방송작가 겸 영상 강사를 하다가 갑작스레 스타트업에 가겠다며 서울에 왔다. 그동안 잠깐씩 타지 생활들을 한 적이 있긴 했지만 아예 정착하겠다고 떠나는 건 처음이었다.


방송작가 시절, A작가님에게 일을 배웠다. 나의 유일한 사수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하나 알려주신 덕분에 나는 빠른 시간 안에 메인 작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분의 사적인 일상 속 추악한 모습들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알면서도 눈 감는 내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분을 부정하는 순간 일들이 끊기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가끔 내게 이런 말씀도 하셨다. 


-너 나 없인 작가 생활 못할걸?


그분 말씀처럼 그분이 없다면 내가 그 바닥에서 일을 못 하게 되는 걸까. 학벌도, 인맥도, 실력도 부족한 내가 꼭 붙잡아야 하는 동아줄이 정말 그 줄일까?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A작가님과 연결된 모든 줄을 다 잘라냈다. 방송작가 5년차 때 이야기다. 서울로 그리고 스타트업으로 떠나버리는 것은 나름의 반항이기도 했고, 내게 준 시험이었다.


말로만 듣던 IT 계열 스타트업은 정말 다이내믹했다. 하루를 일주일처럼, 일주일을 마치 한 달처럼 바삐 움직이는 동료들 사이에서 나도 함께 무언가를 일궈 나간다는 것은 정말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입사한 뒤 잠깐 동안은 성장하는 기분에 한껏 취해있었다. 하지만 나는 환경이 익숙해지자마자 옆 동료의 학벌을 의식했고, 인맥을 시기하며 나와 비교했다. 애초에 가진 것 없이 이 세계로 뛰어들었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성과였다. 그들을 의식하지 않는 척 버텨내고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에만 온 힘을 쏟았다. 때로는 힘 있어 보이는 사람과 친해지기 위해 나를 낮추며 거짓 웃음을 짓기도 했다. 열정적이라는 단어로 포장하기에는 버거운 생활이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괴롭히고 갉아먹어가며 낮은 자존감의 길로 걸어갔다.


내가 모자란 사람인 것 같았다. 부모님만 봐도 평생을 일해오셨는데, 고작 이 짧은 회사 생활로 힘들어하다니. 성실한 부모님 아래에서 끈기 없고 능력 없는 딸이 태어난 걸까. 그렇게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든 날엔 가족이 그리웠지만 찾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몸만 힘들었던 날엔 전화를 걸었고, 마음이 힘든 날엔 훌쩍 기차를 타고 본가에 갔다. 엄마 밥을 먹고, 아빠의 조언을 듣고, 해맑은 강아지의 배를 만지며 또 한 달을 견뎌보려 했다.


본가에 갔던 그 어느 날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식사 중에 엄마 친구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엄마 친구는 취미생활로 우리 회사 서비스를 이용하신다고 했다. 젊은 세대는 물론이고 중년 여성들도 좋아하는 서비스, 그 서비스를 제공하는 요즘 뜨는 회사, 그리고 그 회사에 근무하는 자랑스러운 딸. 한껏 상기된 엄마의 표정과 목소리.


그만두고 싶은 이유만 수십 가지가 되는데, 그만두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이유를 듣게 된 것 같았다. 엄마가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내가 그만둔다고 하면 실망하시진 않을까. 엄마 이야기를 한참 듣던 중에 속마음이 입으로 새어 나왔다.


-나 너무 힘들어서 회사 못 다니겠어...


찰나의 정적이 지나고, 엄마는 덤덤하게 말씀하셨다.


-힘들면 그냥 집에 와.



・ 다음 에세이에서 계속 됩니다.

・ 글쓴이 : 이가루(35/여/회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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