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덮었다. 태양은 자취를 감추고, 하늘은 금방이라도 빗줄기를 쏟아 부을 것처럼 구름을 포개어 쌓았다.
휘익! 한줄기 바람이 땅바닥을 휩쓸고 지나간다. 그 바람을 타고 지혜의 머리에 있던 챙이 넓은 모자가 훌쩍 공중으로 날아갔다.
지혜가 자동반사적으로 모자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꽤 빠른 속도로 모자가 바람에 날아갔는데도, 지혜는 모자가 채 땅에 떨어지기 전에 모자를 낚아챘다.
2미터 정도 되는 거리였는데, 예비동작도 없이 그 거리를 공중 점프한다는 것은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예민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지혜가 순간이동이라도 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의리 없는 모자야! 요따위 바람이 꼬신다고 나를 버리고 가면 되겠어?’
지혜는 모자를 바라보며 타이르듯 중얼거렸다. 이건 지혜의 습관이었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의인화해서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있을 때는 조심하지만, 지금처럼 혼자인 시간이면 지혜는 배우가 일 인극을 하듯 세상 사물과 대화를 나눴다.
동물이나 식물과도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그건 어릴 적부터 있었던 능력이다. 보육원에서 그것 때문에 아이들의 놀림도 많이 받았다.
그게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지혜의 특별한 능력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은 지금 ‘화목 병원’ 원장인 유태민이었다.
어느 날 보육원에 들렀던 태민이 나무 밑에서 혼자 놀고 있는 지혜를 보고 다가갔다.
지혜는 새들을 모아놓고 뭐라고 열심히 말을 하고 있었다. 힐끗 태민을 보더니 몸을 일으키며 크게 말했다.
“그러니까 너희들, 앞으로 싸우면 안 돼. 알았지! 또 싸우면 언니가 혼낼 거야!”
지혜는 태민을 피해 멀리 뛰어갔다. 그리고 그 날, 태민은 지혜를 입양하기로 결심했고, 결국 그렇게 됐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태민이 아니었으면 지혜의 특별한 능력은 그냥 스러져버렸을지도 모른다. 태민은 지혜를 거두어 교육을 시켰다. 타고난 초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은 물론, 무술을 비롯한 여러 가지 공부를 가르쳤다.
말하자면, 태민은 지혜를 ‘지구를 지키는 전사’로 육성해온 것이다.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시냇물을 건너면 호남의 집 입구가 된다. 아직 집은 보이지 않지만, 길 양쪽에 서 있는 장승이 집주인 대신 ‘어서 오십시오’라는 인사를 하며 방문객을 맞이한다.
지혜처럼 그 인사를 즐겁게 받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이들은 ‘내가 들어가도 되나?’ 하며 약간 주저하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모름지기 모든 표식은 받아들이는 이의 심상에 따라 다르게 작용한다.
장승을 지나면 지혜가 좋아하는 길이다. 여기부터 집 앞 정원까지 호남이 전 세계를 여행하며 수집한 골동품들이 구석구석 배치되어 있다.
사람들이 호남의 집을 ‘도깨비집’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골동품들 때문이다. 실제로 도깨비에 관계된 형상들도 많고, 그와 유사한 괴이한 모양의 조각품 같은 것들이 즐비하게 놓여있다.
지혜는 그 기괴함을 사랑한다. 지혜는 그것들 각자에게 즐겁게 사랑을 표현하는데, 그것들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어? 재림아! 일어났네?”
정원에 들어선 지혜가 흔들의자에 앉아있는 더벅머리의 청소년을 보고 반색을 한다. 지혜의 소리에 텃밭에서 일을 하던 호남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웬일이야? 오늘 오는 날도 아닌데.”
“원장님이 가보라고 했어요. 재림이 일어날 줄 아셨나 보네.”
“그 이는 참! 시골의사 하긴 아깝다니까.”
“언제 일어났어요? 뭐래요?”
지혜는 호남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재림에게 다가갔다.
“재림아, 잘 잤어? 괜찮아?”
재림은 흔들의자에 앉은 채 고개만 돌려 지혜를 쳐다보았다.
반갑게 웃으며 다가서던 지혜가 약간 이상한 느낌을 받고 멈춰 서더니 빤히 재림을 바라본다.
“너... 30일 동안 내내 잤어. 잠만 잔 게 한 달도 넘어. 기억나니?”
“...”
“죽을까봐 얼마나 걱정했다고.”
그건 거짓말이다. 사실 걱정할만한 일이었지만 다들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어느 날 오후 재림이 ‘엄마, 나 졸려.’ 하고 방으로 들어간 다음날, 호남은 무슨 일인가 재림의 상태를 살펴보기는 했다. 학교에 갈 시간이 지났는데도 재림은 하루 종일 잠만 잤다.
저녁 즈음 한동안 재림의 곁에서 기도를 한 호남은 무슨 상황이던지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쁜 일은 아닐 거야. 뭐, 나쁜 일이 생겨도 할 수 없고.’
재림을 임신하기 전 일이 생각났다. 그때 호남도 열흘 이상을 잠만 잤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른바 ‘무병’이었다.
잠자는 호남의 꿈속으로 단군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엄청난 힘이 느껴졌지만 겁이 나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살포시 호남을 안아주었고, 호남의 옷을 벗겼다.
어느 순간,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호남의 몸을 휩싸면서 강한 빛이 머리를 때렸다. 그리고 호남은 기절했다.
20년 전, 그 날 이후 호남은 태기가 있었다. 그리고 재림을 낳았다.
갖은 오해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재림의 성을 ‘단’으로 한 것은 그 때문이다. 단군 할아버지가 아버지이니까.
재림을 낳고 호남은 용한 점쟁이로 이름을 날렸다. 단군 할아버지 덕이었다. 많은 돈을 벌었고, 틈을 내어 재림을 데리고 세계여행을 다녔다. 구석구석 세계를 뒤지며 여러 골동품들을 사들였는데, 비싼 값에 되판 것들도 꽤 많았다.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은 없지만 호남은 타고난 예술적 안목이 있었다.
호남 자신이 평범한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호남은 재림 역시 평범한 인생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한다. 유유상종, 비슷한 팔자의 사람끼리 모여 비슷한 삶을 살기 마련이다.
재림이 자신보다 훨씬 오래, 정말 죽음 같은 잠 속에 빠져 있었지만 호남은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뭔가 재림의 인생에 전기가 왔다는 생각은 했다.
뭔지는 모르지만 이제 재림은 삶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재림이 잠든 30일 동안, 지혜는 재림에게 수액주사를 놔주러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엄마인 호남이나 유 원장이나 전혀 걱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혜도 아무 걱정 없었다.
그런데 막상 깨어난 재림을 보니 ‘죽을까봐 걱정했다’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쩌면 내심 그런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괜찮아? 배고프지?”
재림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지혜를 쳐다보았다. 그 표정을 배고프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지혜가 반색을 하며 가방을 뒤진다.
“이 누나가 누구니? 너 줄려고 준비해 왔지롱~”
그건 사실이었다. 지혜는 호남의 집에 올 때마다 재림이 좋아하는 생크림 초콜릿을 사 가지고 왔다. 그동안 항상 재림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 초콜릿은 지혜의 몫이었고, 지혜는 기쁜 마음으로 초콜릿을 먹으며 병원으로 돌아가곤 했다.
결과를 놓고 보면 지혜가 재림을 위해서 초콜릿을 산건지, 그건 핑계일 뿐이고 사실은 자신이 먹기 위해서 산 것인지 분명치 않다.
“그런데 님은 누구?”
재림이 어린아이처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묻자 지혜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어머, 얘 뭐라니? 너, 너...”
당황한 중에도 장난인가 싶어 미소를 짓던 지혜의 얼굴이 차츰 심각해졌다.
예쁜 눈을 깜박거리며 쳐다보는 재림을 외면하며 지혜가 소리쳤다.
“이모! 얘 이상해요... 재림이 아니야. 너, 너야말로 누구니? 응? 그대는 누구세요?”
놀라서 쏘아대는 지혜를 보며 호남이 깔깔거리고 웃었다. 자신도 똑같은 질문을 받고 당황했던 터였다. 그러나 이내 호남은 상황을 긍정했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마 신이 들렸나 보다’ 생각했지만, 어찌하겠는가? 그것 또한 운명이다. 까짓것, 신들린 모자로 살면 그만 아닌가?
호남이 일하던 장갑을 벗으며 두 사람 쪽으로 걸어왔다. 툭툭, 장갑으로 못의 먼지를 털고는 수정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질문하기 전에, 대답부터 하는 게 예의 아닐까? 먼저 물었잖아?”
갑자기 정색을 하고 말하는 호남을 보자 지혜는 갑자기 소름이 끼치며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둘 다 미친 거 아냐?’
순간적으로 여길 빠져나가야 되겠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싸움이라면 자신 있지만 여긴 도깨비집이다. 이 귀신 들린 사람들이 무슨 술수를 부릴지 모른다.
일단 시간을 끌어야 한다.
“나는 뭐... 알다시피... 지혜야. 링거 놔주러 왔는데, 깨어났네?”
지혜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호남이 표정을 풀지 않고 말없이 쳐다보자 지혜는 약간 억울한 생각이 들어 울상이 됐다.
“맞잖아 이모. 이모까지 왜 그래요, 무섭게.”
“이모라고? 아직도 내가 네 이모로 보이니?”
“...!”
지혜의 손이 본능적으로 출장용 의료 백을 움켜쥐었다. 급히 도망을 가더라도 조심해야 한다. 잘못하면 내용물이 깨질 수가 있다. 까짓것 빨면 그만이지만 어쨌든 귀찮은 일이다.
지혜는 미세한 움직임으로 뒷걸음질을 시작했다.
“그냥 가면 안 되지. 우리 재림이 깨어났는데 축하 안 해줄 거야?”
호남이 살짝 웃으며 분위기를 바꾸자 지혜가 울먹이며 대꾸했다.
“나 갈 거야. 무섭단 말이야.”
“알았어. 장난 그만 할게....
네가 좋아하는 누나야. 너 잠든 동안 영양주사 놔준 고마운 누나.”
호남이 원래의 편안한 표정으로 돌아와서는 재림의 귀 가까이 얼굴을 대고 속삭였다.
재림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래. 고생 들 많았어. 이제 나로 인해서 새로운 싸움이 시작될 거야.
각오는 되어 있겠지?”
지혜가 ‘얘는 왜 이래?’ 하는 표정으로 호남을 보고, 호남은 ‘어쩔 수 없다’는 뜻으로 입술을 삐죽거려 보였다.
지혜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재림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너, 제 정신 맞니? ...미친 거 아니지?”
지혜가 다시 울먹이며 눈물까지 글썽거리자 재림이 크게 웃으며 소리 질렀다.
“하하하! 아빠한테 전화해 내가 왔다고. 좋아하실 거야.”
재림의 말에 지혜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분명히 99.999% 거짓말이라고 생각되는 얘기를 들었는데 진짜라고 믿어지는 그런 순간. 이성적으로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건 진짜다’라는 확신이 전해져 온다.
지금 지혜가 그랬다. 지혜는 막 ‘아빠한테 전화를 해야겠다. 뭐라고 말하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생각에 답이라도 하듯 재림이 말을 한 것이다.
지금 이 사람은 내 생각을 읽고 있다!
지혜는 일부러 버텨보았다.
“나 지금 근무 중이거든? 근무시간에 왜 아빠한테 전화를 해? 원장님이면 몰라도.”
“좋을 대로 해. 아빠 원장님한테 하던지. 원장님 아빠한테 하던지.”
“그런데 정말... 너는... 누구세요?”
“아빠한테 물어봐. 그리고... 저녁 먹고 가. 그래도 되지?”
재림이 일어나며 호남에게 허락을 구하듯 말했다.
“그럼! 파티 할까 우리? 깨어난 기념으로.”
“좋지! 포도주 좋은 거 있으면 한 잔 하자고.
괜찮으면 아빠도 오라고 해. 얼굴 좀 보자.”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재림이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헐! 술도 마셔? 근데... 정말 우리 아빠를 아나? 그런 것 같아, 이모?”
“알지 그럼. 우리 집 주치의신데.”
“아니, 재림이 말고. 저 사람 말이야. ... 휘파람도 불잖아요.”
지혜가 비밀이라도 말하듯 속삭였다. ‘휘파람’ 하고 말하는 소리가 휘파람 소리처럼 들렸다. 무의식중에 재림에게 빠져들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게. 휘파람 잘 부는데? 나보다 낫네.”
“이모! 이몬 지금 걱정 안 돼요? 쟤 이상하잖아요.
아저씨처럼 말한다구요. 포도주 좋은 거 있으면 한 잔 하자고. 으웩!”
지혜가 재림의 말투를 흉내 내며 일부러 과장스럽게 역겨운 시늉을 해 보였다. 잠시 심란한 표정이 된 호남이 재림이 앉아있던 흔들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하늘을 보았다.
정원 너머로 가득히 먹구름이 보였다. 호남은 갑자기 눈물이 났다. 운명은 이렇게 먹구름처럼 갑자기 쳐들어온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40년 인생 동안 몇 번의 굴곡이 있었다. 견디기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잘 참아냈고 이겨냈다. 이제 아들 재림도 다 자랐고, 그 아이가 적당히 쓰다가 죽을 만큼 재산도 있다. 걱정할 일이 없다.
걱정하지 않겠다. 호남은 그렇게 생각한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단순히 ‘신이 들어오셨나 보다’ 생각했는데, 그렇게 단순한 것도 아닌 것 같다.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호남은 걱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신이 들어왔건 다른 누가 들어왔건 간에 재림은 자신의 아들이다. 그 아이의 속에 누가 있건 자신이 낳고 기른 아들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제 재림은 깨어났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다. 멋지게 휘파람도 분다! 걱정할 일이 없다. 슬퍼할 일도 아니다.
눈물이 흐르는 것은 슬퍼서가 아니다. 그저 산다는 것에 대한 고단함의 표시이다.
“원장님한테 전화하자. 저녁 드시러 오라고. 재림이 깨어난 거 축하해야지.”
호남의 또르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차분히 가라앉은 호남의 목소리에 지혜는 차마 딴죽을 걸 수 없었다.
‘아빠한테 뭐라고 말하지? 아빠는 모르는 게 없는데, 이 상황은 예상하고 있었을까?’
핸드폰을 꺼내며 지혜는 갑자기 여러 가지 궁금증이 떠올랐다.
빨리 아빠를 보고 싶었다. 아빠라면, 유 원장이라면 지금 상황에 대해 명쾌한 정리를 해줄 것이다.
지혜는 얼른 유 원장의 단축번호를 눌렀다. (제 2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