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든 악에게. –1

2026/01/22

by 나무느을보

의미가 떠나간다. 자리에 엎어지듯 누운 누군가의 좁은 등줄기가 눈에 들었다. 그것은 검고 산발한 머리칼에서 흘러나와 둔부에서 멎는다. 내면의 악에 대해서 떠올리면서 치를 떨었다. 희멀건 숨을 토해내니 몸이 가벼워졌다. 여자는 희락 끝에 깊은 잠에 다다랐다. 우리는 이전까지 돌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곳은 어릴 적 나의 놀이터였다. 부서진 건물의 잔여물인 콘크리트 벽돌담이 자리한 그곳에서 나는 혼자서 공상에 잠기곤 했다. 성채와 같은 많은 것들이 내 머릿속 에서 솟아났고 나는 그것을 얽어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였고 허구였다.


이제 나는 허무해졌다. 그 허무함을 이기지 못할 것은 아니다. 침상에서 노트 한 장을 펼쳐놓고 무엇인가에 대해 부단히 썼다. 주변이 무너지고 숨소리만이 남는다. 곧 그 진득한 허파의 오르내림이 징그럽게 여겨질 무렵 나는 목이라도 긋고 싶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진동이 나를 막아섰다. 그 무엇도 아닌 한낱 전화의 착신음이다. 형이다. “몇 통을 했는데 받질 않아.” “무슨 일인데?” “아버지 일이야.” 다음 순간 날선 말이 날아들었다. 아버지 돌아가셨어.


문득 집의 풍경이 그려졌다. 작은 언덕이 머릿속에서 먼저 떠오른다. 무너진 건물의 잔재와 지금은 살풍경해졌을 마당. 그리고 복층의 다락. 불단. 그 모든 것을 거쳐서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머니. 이젠 어머니의 얼굴을 거치기 위해서는 아버지께서 정신을 놓치기 직전까지 돌아가야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정신이 희끗해지셨다. 금방 머리가 희게 쉬었고, 이상한 넋두리를 자주 하셨다. 어머니는 그 집을 제 몸처럼 훤히 꿰고 계셨으니, 집이 너절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일어서야 된다. 마지막으로 집에 들러보자. 문득 고개를 들어 비친 창에 내 모습을 들여다 보니 흙빛처럼 탁하고 퀴퀴하게만 느껴졌다. 그 주변으로 희끄무레한 것들이 떠다니는 것 같다. 만약 방이 텅 비었더라면 그것들이 나를 압도했을 것이다.


걸리는 것이 있다. 그 집에는 이물의 누군가가 있다. 그 누군가는 분명 내게 분을 삼키고 있다. 몸을 일으키자, 희게 찬 숨들이 뭉치다가 현관문과 함께 벗어났다.


아버지는 문인(文人)이셨다. 시를 쓰는 인간으로 벌이는 늦었다. 가산을 쓰면서 유유적적하게 글이나 쓰는 인간이었다. 당신의 서가에는 갖은 책들이 널려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어려서는 동경하고 조금 머리가 굵어서는 ‘저게 다 무슨 소용인가’싶었다. 아버지께서 저항시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고서도 돈을 가져다주는 것은 강연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뻔뻔스럽게 하시는 입바른 말들에 염증을 느꼈다. 내게 아버지는 저항하는 인간이 아닌 떠밀린 무력한 사람이었다. 터울이 큰 형은 원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인간이라 나와 같은 것을 느꼈을지는 모르겠다. 형은 목석같은 사람이다. 말을 주고받을 바에는 차라리 벽에 머리를 기대어 놓고 나는 혼잣말을 하겠다.


형은 멀찍이 떨어져 살았다. 어쩌면 그 인간은 아버지의 삶에서 떨어지고자 은근하게 발버둥친 것일 수도 있다. 아버지가 정신을 놓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여자가 있었다. 알게 모르게 벌레처럼 숨어든 여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를 인간이다.


버스에 올라서 내내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처럼 공허한 울림도 없었다. 내 뿌리의 절반이 죽었지만 자각은 더디다. 어린 시절의 나는 아버지를 꽤 잘 따랐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턴 반감을 집어삼켰다. 아버지와 나는 닮은 구석이 많았고, 그 닮은 구석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사이가 틀어졌다. 표면적으로 관계를 잘 유지해 온 것은 형 쪽에 가까웠다. 거리상으로는 나의 방이 훨씬 가까웠음에도 나는 집에 잘 들르지 않았다.


곧 익숙한 동네가 눈에 들어온다. 작게 웅크린 집들과 전신주, 가로등 그리고 팽나무가 있다. 거칠어진 집이 드러났다. 나는 숨을 한번 들이마시곤 안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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