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23
적적한 공기가 휘감겨 있다. 시큼한 내음이 풍긴다. 바스락대며 연한 잎사귀를 틔운 관목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거칠어진 바닥만이 반들거린다. 그것을 부단히 닦은 흔적이다. 아버지의 서재로 향한다. 그 작은 방에 빼곡히 채워진 물건들은 하나같이 등을 내놓고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층계 위로 방엔 이제 고요가 깃들었다. 구경하듯이 그것을 훑다가 문득 가로등 아래에 누군가가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오르막길로 컴컴한 나무 그늘이 져 있어서, 그곳에만 밤이 내린 것 같았다. 나는 아랑곳 않고 마당으로 나섰다. 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형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형은 이 집에 관심조차 없다. 어려서부터 형은 속내를 내비치지 않았지만, 아버지를 염오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부엉이처럼 깊은 눈자위하며, 꿰뚫어보는 듯한 침묵. 그리고 항변조차 않는 이지적인 말들. 애초에 둘러볼 심산으로 온 것이다. 다락으로 쥐가 뛰어다니는 음성이 들린다. 꼭 돌멩이를 굴려놓은 것 같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한 번 하고 두 번. 그 여자다.
현관 곁으로 다가서서 문을 여니 경계심 가득했던 여자가 선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왜 그렇게 봐?” 여자는 대답을 않는다. 현관으로 들어서 짐을 놓고 갔다는 둥의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여자가 가로등 곁에서 나를 훔쳐보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마지막으로 당신을 보고 싶었어요.” 속내가 토로된다. “당신이 항상 이야기하는 돌담도 지겨우리만치 구경했죠. 아마 그 이야기로 다른 여자들도 꿰었을 거예요.” “무엇을 말하든 상상이지.” “당신을 보면 치가 떨려요.” “그런데 왜 이곳에 있지? 앙갚음이라도 하려고?” “…동시에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되도 않는 소리. 나는 여자를 두고 2층의 다락이라도 구경하려고 복도로 향하려 했지만 여자는 나를 막아서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난 당신을 사랑해요.” “아버지 돌보다 정신이 나간거야?” “그럴 수도 있죠. 나는 처음에 복수심으로 이곳에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는 당신을 씹어 삼키고 싶을 정도로 사랑했던 거예요.”
다락을 구경하고자 했던 소기의 목적은 이제 아무래도 되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겠다. 저 여자의 품 안에 뭔가를 감추고 있을 수도 있다. 가령 과도라던가. 쇠꼬챙이 같은 물건들 말이다. “…난 가야겠어.” 이 여자는 단단히 미쳤다. 하지만 여자 내게 무엇을 쥐어 주었을 적에 그것이 쌀알처럼 희끗한 물건임에 당혹스러웠다. “불단에 머리가 떨어졌어요.” “무슨 생뚱맞은 소리야?” “정말이에요. 당신 아버지가 손아귀로 꺾어버렸어요.” 손바닥을 펼쳐보니 정말 작은 목상의 머리가 딱정벌레처럼 웅크리고 있다. “저는 아버님이 화내실까봐 이곳저곳 뒤졌었는데 그게 어디 있었는지 알아요?” “어디 있었는데?” “아버지 임종 직전에 그걸 꽉 거머쥐고 계시더라고요. 당신이 그것 좀 붙여요. 저는 접착제가 어디 있는지 몰라요.”
그리곤 여자는 거실로 향하고 나는 얼어붙어서 그 복도에 있었다. 다시 다락에서 쥐가 뛰어다니는 음성이 토도독 하고 울렸다. 아무래도 돌아갈 때가 된 것 같다. 불단이고 이젠 아무래도 좋다. 처음 이 여자를 마주했을 때 이끌린 것은 그녀가 경청할 줄 아는 똑똑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자는 지금 자기 혼자 지껄이고 있지 않은가. 필시 고독이 그녀를 미치게 만든 것이다. 다만 손바닥에 자리한 작은 알갱이가 걸렸다. ‘그래, 이것만 붙여놓고 가자. 이것만 어울리고. 다신 오지 말자.’ 공구함은 다락에 있을 것이다. 나는 2층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