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늘한여름밤 Jan 12. 2018

사랑도 100점 받을 수 있을까?

나는 뭐든 잘하고 싶은데, 사랑도 잘할 수 있을까?


며칠 전 섹스는 망했다.


둘 다 만족하면 100점, 나만 만족하면 70점, 너만 만족하면 40점, 둘 다 만족하지 못하면 0점이라면, 그 날의 섹스는 0점이었다. 나는 섹스가 망하면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다. 우리한테 어떤 문제가 있다는 불길한 징조 같았다. 영화나 티비에서도 행복하고 사랑하는 연인들은 열정적인 섹스를 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침대를 떠난다. 반면 문제가 있는 커플은 섹스가 제대로 안되고 둘 중 한 명이 체념한 표정으로 이불을 걷으며 침대를 떠나지 않는가? 불행한 커플의 여주인공처럼 내 얼굴은 굳어있었던 거 같다. 너는 나와 눈을 맞추지도 못한 채 풀이 죽은 얼굴로 미안하다고 했다.


순간 미안하다는 너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미안해? 뭐가 미안하지? 너는 뭘 잘못한 걸까? 네가 잘못했다고 평가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너는 마치 빨간 빗금이 죽죽 간 빵점 자리 시험지를 내미는 아이 같은 표정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 알았다. 그 시험지의 채점자는 나였다.


 

함께 있는 시간에 서로 딴짓 하면 -10점. 서로 솔직한 감정을 얘기하면 +20점. 별 생각 없이 함께 게임을 한다면 -5점, 하지만 이 게임을 통해 상대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면 +5점. 미술관이나 전시관 데이트는 +15점,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데이트는 0점. 좋은 섹스를 하면 +20점, 망한 섹스는 -30점.


나는 너와의 사랑에서 100점을 받고 싶었다. 좋은 관계를 맺고 싶었다. 우리 엄마 아빠 같은 관계 말고. 나는 사랑이나 관계에 대해 제대로 보고 배운 게 없다. 뭘 하면 안 되는 지는 부모님을 통해 확실하게 배웠지만, 대신 뭘 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그래서 사랑과 관계에 대한 책과 논문을 열심히 찾아 읽었다. '행복한 관계를 만드는 11가지 비법', '금술 좋은 부부들의 7가지 공통점' '사랑하는 연인들이 꼭 나눠야 할 대화' 등등 인터넷에 떠도는 이런 제목의 글들을 꼭 클릭해봤다. 교과서 위주로 예습, 복습 철저히 하고 가르쳐 준 대로 하면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에 대한 부실한 조기교육을 나의 성실함과 노력, 굳건한 의지로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이를 악물고 다짐하듯 나도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나는 정말 사랑을 잘하고 싶었다.

 나는 늘 노력했다. 너와 함께 있는 순간들을 의미 있게 만들고 싶었다. 사실 밥 먹을 때 나는 너와 대화하는 것보다 드라마 보거나 핸드폰 보는 게 더 편한데 애써 참았다. 그리고 각자의 핸드폰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옆 테이블 젊은 연인들을 보며 모종의 우월감을 느꼈다. 어떤 날은 너랑 아무 말도 안하고 바로 자고 싶은데 그러면 좋은 연인이 아니니까 졸린 눈을 비비며 이야기를 이어갔을 때도 많았다. 주말 데이트로 쇼핑만 하면 왠지 죄책감이 느껴졌다. 연인 간에 섹스는 일주일에 한번이 이상적이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주워듣고 이 기준을 지키려고 했다. 매일 매일이 작은 쪽지시험이었다. 나는 이 시험문제의 출제자이자, 응시자이자, 채점자였다.

 뭐든 잘하려고 하는 건 참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때로 너와의 관계가 왜 피곤한지도 모른 채 피곤했다. 그래서 나는 네가 내 기준을 맞추지 못할 때 울컥 울컥 화가 났다. 혼자만 발 동동 구르며 팀플을 끌어가고 있는 팀장이 된 느낌이었다. “왜 나만 이렇게 열심이어야 하지?!”. 시간이 갈 수록 관계는 깊어져야 했다. 섹스는 지겨워지지 않아야 했다. 레벨이 올라갈 수록 점점 더 레벨 업이 힘들어지는 게임처럼 우리는 점점 더 노력해야 한다. 노력하지 않는다면 이 관계는 시들어버릴 것이다. 그러면 나는 우리 부모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제기랄 그래서는 안 된다. 이 사랑이 망해서는 안 된다. 나는 매 분기별로 우리의 관계가 계속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받아보길 원한다!



 
평소의 나라면 이 망한 섹스가 망한 원인을 파악하고, 앞으로의 개선 대책과 재발 방지 계획을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은 미안하다는 너의 말에 너를 봤다. 너의 표정은 슬퍼 보였다. 나를 실망시켰다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나도 네가 나를 실망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를 실망시켰던 것은 너의 수행이 아니라 나의 기준이었다. 오르가즘에 다다르지 않았다고 망했다고 생각하는 건 나의 기준이었다. 나는 너를 봤다. 나는 채점표를 내려놓고 너를 안았다. 사랑할 때 봐야 할 것은 나의 기준이 아니라 너의 마음이었다. 미안하다는 너에게 나는 처음으로 말했다. “이건 망한 섹스가 아니야.”

 섹스의 목적은 오르가즘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다. 함께 살을 부비고 친밀함을 나누면 그걸로 충분하다. 마찬가지로 이 사랑의 목적도 어딘가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다. 내 기준에 맞는 이상적인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밥 먹을 때 때로 서로 폰만 보고 있더라도, 주말에 데이트 하지 않고 잠만 쿨쿨 자더라도,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의미가 있는 건 아닐지라도 우리는 사랑하고 있다. 우리 앞에 놓인 관계는 시험지가 아니라 도화지이다. 맞고 틀린 것은 없다. 함께 좋아하는 순간들을 그려나가면 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느끼고 함께하는 모든 순간들이 쌓여서 우리의 사랑이 될 것이다.

그러니 망한 섹스는 없다. 망한 사랑도 없다. 우리의 사랑은 채점될 수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