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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식집사가 된다

by ri

일주일 전쯤 인생 최초의 분갈이를 했다. 자취 2년 차가 되었을 때쯤 문득 집안에 식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첫 화분을 들였었다. 그게 23년 12월이었으니 다음 달이면 어느새 우리 집에 온 지 2년이 된다. 실내에서도 부담 없이 키울 수 있는 식물인 스파티필름으로 처음에 올 때부터 하얀 백합 같은 꽃봉오리가 있어 두어 번 꽃을 피우기도 했다.


이전에도 식물을 키워본 적이 있었는데 초등학생 때와 스무 살 무렵이었다. 나의 첫 식물은 아빠와 함께 어느 꽃집에서 고른 애플민트였다. 그리고 그 자리엔 없었지만 동생의 몫으로 페퍼민트를 골랐었다. 그때는 아빠에게 잘 키우겠다며 다짐하고 식물에게 이름도 지어줬던 것 같은데 며칠이나 물을 줬을까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금방 흥미를 잃고는 관리를 제대로 해주지 못했고 민트들은 얼마 있지 않아 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음은 엄마의 사랑초로 예쁜 연보라색 꽃이 피는 식물이었다. 오며 가며 물도 주고 알바로 모은 돈으로 산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남기기도 했었다. 그런데 꽃이 지고 몇 달이 지나자 나는 곧 사랑초에 무신경해지고 말았다. 거기다 엄마는 우리 집에서 유명한 식물살인마로 잊을만하면 집에 화분을 들이고 꾸준히 관리를 해주지 않아 죽이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게 식물들을 떠나보내고 나는 엄마만큼이나 나 역시 딱히 식물을 돌보는 데 재주는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는 다시는 내 손으로 식물을 들이지 않았었다.


변명을 하자면 그때는 지금처럼 정보를 쉽게 찾기 어려운 시절이었어서 식물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부족했었다. 또 결정적으로는 내가 식물들을 잘 키울 수 있을 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던 때였다. 더 정확하게는 내가 생명체를 키울 수 있는 시기가 아니라 나부터 컸어야 하는 시기였다고 할까.


스파티필름은 2주에 한 번씩 물을 준다. 식물이 죽는 이유는 보통 추위와 과습이라고 해서 되도록 조심하려고 물을 준 날은 꼭 달력에 표시를 해둔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 다행히도 잘 살아주는 식물을 보면서 조금 자신감이 붙은 나는 둘째로 금전수를 들인다. 돈나무라고도 불려서 개업 선물로 많이들 찾는 식물이다. 물론 나야말로 주머니사정이 영 좋지 않아서 돈을 부르는 식물이라면 마다하지 않긴 하지만 금전수를 택한 이유는 바로 강한 생명력 때문이었다. 또 물 주는 주기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라 관리도 쉬운 편이다. 초기에 잘 모르고 물을 자주 줬을 때는 갑자기 줄기가 풍성해지더니 요새는 크게 늘어나지 않고 있다.


셋째는 파키라였다. 스파티필름과 같이 2주에 한 번씩 물을 주면 되었다. 그런데 한 6개월쯤 지났을 때였나 이파리가 시들어 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처음 택배로 받았을 때부터 이파리에 있던 점들이 신경 쓰였는데 그 점과 관련이 있는 건지 아니면 관리를 못한 나의 탓인지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해가 부족해서 그런가 하고 베란다로 화분을 옮기고 틈틈이 환기를 해주었다. 하필 집 주변에 마땅한 꽃집이나 화원이 없어서 도움을 청하지도 못한 채로 시름시름 앓던 파키라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파키라를 데려왔던 곳에 문의를 해볼걸 하는 후회가 남아있지만 미련스럽게도 당시에는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이제 와서 모든 것들이 변명밖에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파키라를 보내고 속상함이 조금 가라앉자 빈자리가 유독 허전해 보였다. 이내 새로운 식물을 데려오고 싶다는 마음과 또 살생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나름 진중했던 몇 날 며칠의 고민 끝에 테이블야자를 데려오게 된다. 집안에 화분을 더 둘 곳도 없어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었다. 세 개의 화분이 집 곳곳에 자리를 잡자 초록색의 이파리들이 삭막하고 건조했던 공간에 생기와 화사함을 가져다주었다. 이뿐만 아니라 공기 정화나 수분 공급의 기능도 하겠지만 어떤 가구나 소품과도 비교할 수 없는, 식물만이 뿜어내는 생명력은 지친 눈과 마음을 쉬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해냈다.


푸릇푸릇한 활력이 감도는 집안의 풍경을 둘러보면서 한편으로는 과거 식물살인마였던 나와 무슨 인연인진 모르겠으나 어찌어찌 함께 살게 된 우리들의 현재가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더는 화분을 늘리지 않겠다고 했던 말과 달리 테이블야자가 해가 약한 우리 집에 적응을 잘 마치고 나자 나는 잎이 꼭 수박 줄무늬를 닮은 귀여운 수박페페에게 마음을 뺏기고 만다. 페페는 3개월쯤 지나니 잎이 시들시들해져서 베란다로 자리를 옮겼더니 다행히 지금까지도 잘 자라고 있다.


서늘한 늦가을, 더는 미룰 수 없다는 마음으로 첫째의 분갈이를 마치고 나니 그동안 좋은 환경이 아닌데도 죽지 않고 무럭무럭 꿋꿋하게 잘 자라준 녀석이 참 대견하고 감사했다. 그러면서 문득 고양이에 식물들까지 어느새 여러 식구들을 건사하고 있는 내가 조금 어른이 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는 나 아닌 다른 생명체를 키워도 되는 때가 온 것일까. 분갈이를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해서 영양제도 주고 눈여겨보며 3주 정도 지났는 데도 첫째는 여전히 건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인생 첫 분갈이를 기념해 여섯째 넉줄고사리를 데려왔다. 우리 집에서는 가장 작은 몸집이지만 분위기 있는 생김새와 수형에 절로 눈길이 머문다. 여기에 더해 이번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쯤엔 욕실에서도 잘 자란다고 하는 스킨답서스를 들일 계획까지 세우고 벌써 욕실선반에 화분이 놓일 공간을 만들어 두었다. 집이라고 해봤자 원룸이라 협소하지만 조금 더 신경 써서 청소하고 꾸준히 관리하면 우리들의 동고동락은 앞으로도 그럭저럭 잘 이어져 갈 것이다.


작은 집에 고양이가 오고, 식물들이 늘어나면서 나에게 바뀐 것이 하나 있는데 예전에는 집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면 이제는 아이들을 좀 더 좋은 곳에서 돌보고 싶다는 작은 바람이 생겼다는 점이다. 무언가로 인해 더 열심히, 잘 살아야 할 이유가 늘어났다는 건 좋은 뜻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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