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래와 까마귀
둘째 날인 오늘은 제주의 서쪽 끝으로 가기로 했다. 어제 그렇게 많이 걸었는데도 아침에 가볍게 눈이 떠졌다. 눈을 뜨자마자 오늘 만날 돌고래들을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노을 해안로 시작 지점으로 갔다. 노을 해안로는 차만 다니는 해안도로라 인도가 없다. 그늘도 없고. 길 가운데에 강태공들을 위한 자그마한 편의점이 하나 위치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뙤약볕 아래에서 그 길을 걷고 또 걸었다. 해변으로 걸을 수 있는 길이 없기도 했고, 제주도 답게 돌무더기로 된 해안인지라 해안가로부터 좀 떨어진 도로를 걷게 됐다. 그러다 보니 가로수 나무에 가려 바다가 안 보일 때도 있고 거리가 멀어 작게 이는 물보라는 모두 돌고래로 보이기도 했다.
- 저기 돌고래 아니야?
- 저기 보이는 거 돌고래 맞나?
끊임없는 의심과 실망. 돌고래는 없었다. 한 시간을 넘게 걸은 것 같다. 중간에 있는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사 먹기로 했다.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비건 아이스크림은 '탱크보이' 뿐이었지만 더위를 날리기에 이만한 아이스크림도 없다 싶었다.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길고 무거웠던 도보의 피로를 덜어주었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다시 걸을 차례가 되었다. 우리는 무거운 배낭을 숨기기로 했다. 10킬로가 넘는 배낭을 메고 계속해서 걷는 건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편의점 앞의 바위더미를 기어 내려갔다. 멀리 낚시꾼 몇 분 외에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벌레가 가방으로 기어 들어갈까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벌레 몇 마리 외에 우리 가방을 탐 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바위틈에 가방을 끼워두고는 연신 뒤돌아보며 자리를 떴다.
가방을 내려놓으니 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땀에 절은 등이 시원했다. 이대로 계속 걷기만 해서는 돌고래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낚시하고 계신 분께 한 번 여쭤보기로 했다. 늘 바다를 마주하고 서 계시는 분들이니 가장 잘 아실 것 같았다. 어기적 어기적 바위를 뛰어넘어 가장 깊숙한 곳에서 낚시 중인 분께 인사를 건넸다.
- 안녕하세요. 혹시 여기서 돌고래를 보셨나요?
뒤돌아 본 아저씨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바다에 그을리면 이렇게 타는구나 싶었다. 더는 까매질 수 없을 것 같은 피부색이었다. 아저씨께서는 돌고래들이 이 앞으로 오가니 여기서 기다리면 곧 볼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오는 길에 배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건 못 봤냐고 물으셨다.
말씀하신 배는 돌고래 관광선박이다. 배를 타고 돌고래를 보러 나가는 관광선박을 운영하는 회사들이 있다. 이는 돌고래들의 서식지를 헤집어 놓는 행위이다. 우리가 선박을 이용하지 않고 한참을 걸은 이유이다. 그런데 그 선박의 움직임이 돌고래를 찾는데 도움이 되다니, 아이러니하다.
*돌고래 관광선박 문제 및 제주 남방돌고래 관련 정보는 핫핑크 돌핀스 계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instagram.com/hotpinkdolphins/
우리는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방에서 캠핑 의자라도 가져올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다가오는 파도소리가 기분 좋았다. 가끔 크게 부서지는 파도에 맞아 옷이 서서히 젖었다. 그렇게 얼마를 기다렸을까. 삐-삐-하는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돌고래였다. 이곳에서 기다려 보라고 말씀하신 낚시 아저씨께서 우리를 돌아보며 씨익 웃어주셨다. 드디어 돌고래들이 우리 앞으로 온 것이다. 돌고래들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 발치까지 다가와서 멋진 수영과 매끈한 그들의 등을 뽐내고는 다시 돌아나갔다.
생명을 보는 것만으로 이렇게나 벅차고 행복하다. 오래 기다린 보답일까. 우리가 걸어온 덕분일까. 이 날 돌고래 수십 마리와 인사하며 한참을 바라보다 왔다. 아직도 이 돌고래들을 잊을 수가 없다. 끼룩끼룩 자그마하게 들리던 그들의 노랫소리도 아름다웠다. 매끈한 등은 낚시꾼 아저씨를 새카맣게 태운 그 바다의 강렬한 햇빛을 떠안아 더욱 빛이 났다. 굴곡진 바다 파도 사이에서 뽐내던 그들의 빛나는 몸은 보라색, 하늘색, 파란색, 분홍색, 온갖 빛깔을 담고 있었다. 특히 가까이 온 돌고래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그 미소 띤 입과 눈을 모두 볼 수 있었을 때 가장 기뻤다. 자연에서는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구나, 귀여운 돌고래야.
돌고래의 이동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돌고래를 보느라 시간을 볼 새가 없어서 얼마간 그 자리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수십 마리가 지나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어느 순간부터 돌고래의 노랫소리가 잦아들고 오가는 친구가 서서히 줄었다. 이제 바위에 숨겨둔 가방을 찾아 예약해둔 야영장으로 이동해야 했다. 낚시 아저씨게 다시 한번 감사인사를 드리고 바위에서 나왔다.
오늘 밤은 서귀포 자연휴양림에서 묵기로 했다. 데크 하나를 미리 예약해뒀다. 이미 해 질 녘이 되어 숲에서 먹을 비건 빵을 몇 개 사고 택시로 이동했다. 이곳은 대부분 차를 타고 오는 곳이었다. 차를 타고 온 사람들은 야영장 바로 옆에 주차를 하고 들어가지만, 우리는 휴양림 입구에서 예약 확인 후 30분 정도 숲길을 걸어가야 했다.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또 걸을 일이 생겼다는 것이 좋았다.
제주의 숲은 풀이 구석구석 뒤덮어 흙이 보이지 않는다. 영험한 존재가 살고 있을 것 같은 신비로운 풍경의 숲. 서울에서 보던 풀과는 종류가 다른 녀석들이 땅과 나무와 하늘을 뒤덮고 있다. 시원한 숲길을 따라 계속해서 걸으면 야영장이 나온다. 우리가 예약한 데크를 찾아 텐트를 쳤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밤의 숲에서 자본 적이 있었나? 어둡고 조용하다. 멀리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던 단체 팀도 숲에 어둠이 내리자 알아서 조용히 텐트로 들어갔다. 산 아래는 바다에 들어갈 만큼 더웠는데 이곳은 점퍼를 걸쳐야 할 만큼 추웠다. 적막하고 새카만 숲은 마치 이곳이 완전히 분리된 다른 세상인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어둠이 내려앉고 나서도 우리는 작고 사소한 것들로 시간을 보냈다. 편의점에서 대충 산 귤이 너무 맛있음에 놀라며 귤 한 봉지를 다 비우고, 도로에서 길 잃은 벌레를 흙으로 보내주었다. 이름 모를 벌레는 폭신한 흙 위에 내려주자 우다다 흙을 파내어 그 안으로 숨었다.
숲의 밤은 빠르게 깊어갔고 다른 사람들도 잠들 준비를 하시는 것 같았다. 우리도 오늘은 포근한 침낭 속에서 조금 일찍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텐트로 들어갔다. 잠들기 전 지퍼를 조금 열자 숲 내음이 텐트 안에 가득 찼다. 숲의 바람은 선선하고 투명했으며 우리는 따뜻한 침낭 안에서 서늘한 숲의 기운을 원 없이 마시며 잠들었다.
- 까악 까악
다음날 아침, 어서 자리를 정리하고 나가라고 까마귀가 그렇게 울어대더라. 까마귀는 아침부터 바지런히 다가왔다. 서귀포 자연휴양림에는 까마귀가 많이 산다. 휴양림에 들어서는 입구부터 까마귀 여럿이 푸드덕 날갯짓을 하고 서로 질세라 우렁차게 울어대기도 했다. 그 많던 까마귀들은 해가 지자마자 잠자리를 찾아갔는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더니, 해가 뜨자마자 가장 먼저 일어나 울었다.
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화장실까지 걸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가장 늦게 텐트를 치고 자리를 잡은 우리라서 숲의 모습을 채 들여다보기도 전에 해가 졌다. 아침 풍경을 통해 비로소 우리가 어떤 숲에 있는지 살펴보게 되었다. 야영장 가득 편백나무가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올라 있었다. 숲의 아침 공기는 달랐다. 코가 뻥 뚫리는 시원함이 있었다. 고요한 숲인데 까마귀들만 까악- 까악- 서로 조용히 지내는 캠퍼들을 놀리기라도 하는 듯 노래했다.
우리는 숲으로 들어오기 전 근처 빵집에서 사 온 빵을 꺼냈다. 까마귀 녀석들이 탐낼까 봐 걱정됐지만 다가오지는 않았다. 평소에는 잘 마시지 않는 인스턴트커피를 미지근한 물에 타서 빵과 함께 먹었는데도 맛이 좋았다. 빵은 캄파뉴라고 해서 샀건만 왜 흐물흐물 힘이 없는 것일까? 까끄러운 껍데기를 기대하고 샀던 빵인데 카스텔라처럼 부드러웠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밖에서 먹는 밥은 다 맛 좋다.
남은 흔적 없이 자리를 정리하고 짐을 쌌다. 오늘은 다시 바다에 들어가는 날. 도착한 날은 해가 질 새라 허겁지겁 노느라 제대로 물놀이를 하지 못했다. 이번엔 물안경도 챙겨 첨벙첨벙 놀아보자고 했다. 차가 없어서 달팽이처럼 집과 가재도구를 짊어지고 다니지만 덕분에 좋은 걸음을 많이 걸을 수 있다. 시원하다는 말로 설명이 안 되는, 어딘가 더 투명한듯한 공기를 마시고 자고 일어 나니 피로가 다 가신 것 같았다. 어제보다 10배는 걸을 수 있겠다 싶었다.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우거진 이끼 숲을 하염없이 보느라 숲을 빠져나오는데 한참이 걸렸다. 휴양림 출구 맞은편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수녀님 몇 분이 버스를 기다리고 계셨다. 근처에 수도원이 있는 걸까? 우리는 가방을 어기적 어기적 내려두고 버스를 기다렸다. 제주 버스는 기본이 30분이다. 20분 기다려 타는 날에는 운수 좋았다 싶다. 이번엔 운수가 좋았다. 버스를 타고 중문으로 향했다.
비건 옵션이 있는 쏭타이 제주가 중문에서 가까웠다. 덕분에 별미 음식을 점심으로 먹을 수 있었다. 바로 근처에 스타벅스가 있어 시원한 음료도 한 잔 했다. 가게에 들릴 때마다 한자리 차지하는 우리 가방이 우스워 사진도 한 장 찍었다. 커다란 박배낭을 메고 가게에 들어설 때마다 사람들이 놀라는 걸 보면 생각보다 등짐을 짊어지고 도보여행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가 보다. 아니면 우리가 들리는 장소들이 도보여행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던 걸까? 적합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겠나. 우리가 걷기 좋고 즐거우면 거기가 길이니까. 우리 가고 싶은 대로 다니는 여행이 좋다.
중문 바다는 수영장 같았다. 금능해변은 유아풀이었다면 중문은 말 그대로 성인풀이었다. 조금만 걸어 들어가도 물이 가슴께까지 차올랐다. 파도가 크면 발끝이 살랑살랑 뜨면서 나를 긴장하게 만들기도 했다. 바닷물에 드러눕자 파도가 나를 구름으로 넘실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곤 했다. 그 울렁임이 좋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둘 다 등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그는 살갗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쉬지 않고 놀았다. 가져온 물안경을 끼고 물속을 들여다보자 생각지도 못한 물고기들을 만났다. 손바닥 만한 작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사람들 다리 사이를 오며 가며 헤엄치고 있었다. 이 친구들은 무엇을 먹고사는 걸까? 물놀이에 정신없는 사람들 사이를 몰래몰래 헤엄치는 녀석들이 귀여웠다.
뙤약볕에 모래가 너무 닳아 올라서 맨발로 몇 걸음 걷기도 어려웠다. 멀찍이 벗어둔 배낭에 물을 가지러 간다고 걷다가 점점 발바닥이 뜨거워 다시 물가로 들어왔다. 마치 불에 올린 냄비 같아 오래 딛고 서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는 그런 뜨거운 모래가 좋다며 몸에 모래를 치덕치덕 발랐다. 뜨겁지 않냐고 물어보니 따뜻하니 기분이 좋다고 했다. 손은 까맣게 모래 범벅이 되었는데 손톱엔 모래가 붙지 않는다며 아이처럼 신기해했다.
더 이상 못 놀겠다 싶을 때까지 놀려고 했는데 우리는 생각보다 빨리 지쳤다. 그래도 3시간은 놀았을까? 바다수영은 수영장과는 달랐다. 살아있는 파도들이 내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서 내 체력은 금방 바닥났다. 바다에서는 할 게 참 많았다. 그저 물속에 물고기들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었다. 스노클 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이번 겨울에 꼭 스노클을 배워서 내년에는 바다를 더 신나게 즐겨야지 생각했다. 헤어지기 아쉬웠지만 중문 바다와 작별하고 숙소로 향했다.
아침에는 숲, 낮에는 바다.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풍요롭고 행복하다. 맨몸으로 필요한 도구도 없이 그저 자연 안에 몸을 담그는 것 만으로 삶이 만족스러워 진다. 자연을 가까이 두고 살고 싶다. 당장 이사할 수는 없으니 우리는 달팽이처럼 등에 집을 짊어지고 백패킹을 간다.
저녁에는 서귀포 시내를 걸었다. 45년 되었다는 중식집에 들러 채식 짜장면과 짬뽕을 먹고 숙소 근처의 수제 맥주집에서 맥주를 한 병씩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침대에 앉아 이번 여행 처음이자 마지막 맥주를 마시면서 잠에 들 준비를 했다.
이렇게 이번 여행은 마무리가 되었다. 여름이 이미 다 도망가고 없을까 봐 어찌나 걱정을 했는지. 모두 기우였다. 제주의 여름은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 여름 그대로의 여름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꾹꾹 눌러 담고 공항으로 향했다. 다시 제주에 오면 이번에 못 가본, 다음에 가야 할 곳들을 수군데 꼽으며 비행기에 올랐다. 제주야 즐거웠어. 금방 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