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도망가지 못한 여름
- 비행기표가 엄청 저렴해. 기차보다 더 싸잖아!
그가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이번 여행에서 그동안 차곡차곡 준비했던 백패킹 장비들을 개시할 요량으로 여행을 계획했다. 드디어 캠핑 용품들이 제 역할을 할 차례다. 실내 클라이밍만 하다가 3년 전 자연암벽 등반을 시작하면서 우리 둘 다 지붕 아래 있는 것이 답답해졌다. 얼거나 쪄 죽을 정도만 아니면 밖으로 나간다. 이번엔 잠도 밖에서 자보기로 했다.(텐트 지붕이 있긴 하지만)
제주도에서 만나고 싶은 동물이 있어서 이번 여행은 제주의 서쪽을 반 바퀴 돌기로 했다. 우리는 구체적인 여행 계획은 따로 세우지 않는다. 다만 가보고 싶은 장소들이나 전체적인 동선만 크게 추려 지도에 표시해두고 여행은 그 지도를 기준으로 발 가는 대로 걷는다. 얼추잡아 여행 동선을 짜느라 제주 이곳저곳의 사진을 보다 보니 동쪽에도 가고 싶은 곳이 수두룩 빽빽이었지만, '못 가면 어때 또 올 거잖아'라고 생각하며 고개 돌려 외면했다. 8월 말에 제주에 가면 바다에 못 들어가는 거 아닐까 걱정을 많이 했더랬다. 하지만 우리의 기우를 비웃듯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여름이 우릴 반겼다. 아직 도망가지 못한 여름이 제주에는 남아 있었다.
박배낭을 메고 걷는 것은 처음이지만, 등반장비를 짊어지고 경남 여행을 한 적이 있어 그 무게는 익숙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여행하는 우리라서 거대한 가방을 메고 사람이 붐비는 도심을 걷는 일도 간간히 있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곳에는 우리가 어울리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거리의 다채로움에 작게 기여하는 것 같아 묘하게 기분 좋았다.
비건 옵션이 있는 식당을 찾아 점심을 해결했다. 도토리 키친은 청귤 소바가 유명한 국숫집인데 청귤 국수와 유부초밥을 비건으로 주문할 수 있다. 워낙 인기 있는 식당이라 문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평소에는 줄이 있으면 다른 식당으로 가는 우리지만 제주에 온 만큼 기다리기로 했다. 딱히 다른 채식 옵션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국수는 상쾌하고 맛있다. 제주의 뙤약볕을 잠시 식혀주는 시원함이었다.
그리곤 해가 질세라 서둘러 금능해변으로 출발했다. 우리 마음은 서두르지만 제주 버스는 그렇지 않았다. 배차 간격이 아주 긴 버스를 타고 가야 하기 때문에 정류장에 한참 앉아 있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싱겁게도 우리가 타려던 버스가 정류장에 바로 들어와서 타이밍 좋게 탈 수 있었다. 운 좋게 바로 탄 것은 이때 딱 한 번 뿐이었지만.
제주 버스여행은 벌써 세 번째다. 그동안 한 번 제주 버스 노선이 전반적으로 바뀐 적이 있다. 그 해에 갔던 버스여행에서 헛갈리는 버스 노선에 불만을 토로하는 제주 할머니들을 많이 만났었다. 나의 짧은 경험에도 변경 전이 더 버스 여행하기 좋았던 것 같다. 어찌 되었건 제주 버스는 한 시간 대기할 마음으로 기다려야 하는 건 다르지 않다.
금능해수욕장 야영장에 도착했다. 실제로 풀밭에 텐트를 피칭하는 건 처음이라(집에선 몇 번 펴봤지만...) 어떤 곳이 좋을지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그냥 이곳으로 하기로 했다. 빨리 텐트를 치고 옷을 갈아입고 바다로 달려 나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요즘 코로나로 샤워실이 모두 폐쇄되어 바닷물에 몸을 담그면 씻을 일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뒷일은 생각지 않고 당장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머뭇거린 적이 많았다. 바다에 몇 번을 왔지만 물에 몸을 담근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저지르면 어떻게든 해결되는 것인데, 우리는 무엇이 그렇게 무서워서 쭈뼛댔던 걸까? 그렇게 놓쳐버린 시간들이 지금에 와 아까웠다. 자연에 나와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배운 한 가지, 기회가 되면 무조건 하라는 것이다. 자연에서는 장소도, 날씨도, 풍경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 그날 그 바다가 들어갈만하다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가벼운 몇 가지의 물건만 챙겨 털레 털레 해변으로 나갔다. 수영복을 입고 밖에서 걷는 게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헐벗은 기분. 그래서 나는 반바지와 티셔츠를 수영복 위에 걸쳤다. 그는 바로 앞이니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내가 시키는 대로 티셔츠를 입어주었다. 몇 걸음 나가자 벌써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사람이 우리 앞으로 지나갔다. 내 눈에도 그들이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거봐 그냥 나와도 아무렇지 않잖아'라고 그가 말했다.
옷을 벗고 바다로 들어갔다. 바닷물의 온도는 딱 좋았다. 해가 지기까지 아직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수영장에 갈 수 없게 되었다. 얼마 만에 물에 들어가는 것인지. 둥실둥실 물에 떠오르는 촉감이 너무나 그리웠다. 사람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바다에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금능은 얕은 바다였다. 누구는 유아풀이라고도 했다. 정말 그랬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도 물은 허벅지까지 겨우 차는 정도였다. 더 걸어 들어가기를 포기하고 풍덩 물에 누웠다. 물살이 내 몸을 감싸고 넘실넘실 흐르는 느낌이 좋았다. 기분 좋다.
금세 하늘은 노을이 들었고 30분 후에는 바다에서 나와야 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샤워실이 폐쇄라서 그와 나는 근처 화장실에서 물병으로 연거푸 물을 끼얹으며 대충 샤워 아닌 샤워를 하고 텐트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제대로 씻지 못했는데도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해가 지고 사람들이 돌아간 바다는 조용하게 비었다. 언제 나왔는지 저 멀리 오징어배들 불빛만 도시의 야경을 대신해서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근처 편의점에서 산 비건 육포와 무알콜 맥주를 들고 바닷가로 다시 나갔다. 테이블과 의자를 펼치고 파도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었다. 현철의 큰 발 옆으로 엄지손톱만 한 게가 느릿느릿 기어갔다. 생명으로 가득한 바다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이렇게 좋을 수 있구나. 바다는 참 좋은 것이구나.
평소보다 일찍 잠에 들었다. 여정이 피곤했는지 시간이 이른데도 뒤척이는 기색 없이 바로 잠들었다. 혹시 해가 떠서 일찍 깨면 피곤할까 봐 안대를 쓰고 잤는데 아침 7시쯤 저절로 눈이 떠졌다. 안대를 벗어보니 붉은색 텐트 색깔로 주변이 가득 차 있었다. 맞다, 나 어제 텐트에서 잠들었지. 나 지금 제주였지!
그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움직여 텐트 지퍼를 열어 보았다. 텐트 앞에는 키가 큰 야자수들이 줄지어 서서 '여기가 제주요' 외치고 있었다. 비가 올 수도 있다는 예보에 지난밤 어두운 중에 헤드랜턴을 끼고 둘이서 어설프게 타프까지 쳤는데 비는 오지 않았다. 텐트 안에서는 수많은 소리가 들린다. 바람에 텐트에 모래인지 나뭇잎인지가 부딪히면서 계속 빗소리 같은 토독 토독 하는 소리를 냈다. 우리는 청각이 있는 대로 없는 대로 예민해져서 새벽부터 밤잠을 설쳤더랬다. 그만큼 우중 캠핑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비는 오지 않았다. 우중 캠핑이 얼마나 고생 인지도 모르는 우리는 그저 아쉬웠다.
비도 오지 않는 맑은 하늘 아래 무당벌레처럼 숨어든 우리의 빨간 텐트. 텐트를 철수하고 자리에 남은 것이 없는지 구석구석 살피며 우리의 흔적들을 수습했다. 그리고는 어느새 익숙해진 10킬로 넘는 등짐을 들쳐 메고 출발했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걸음을 딛는 것이 좋다. 생각이 비워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일에만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계속해서 맴돌고 있다. 바로 돌고래. 오늘은 돌고래를 만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