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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아트 Feb 13. 2020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공격 받아... 음악으로 상흔 치유

<24>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성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
26회 넘는 공격…스코틀랜드 전쟁사 중심지
궁전·감옥 등 시대 따라 다양한 용도로 활용
1947년부터 전 세계 군악대 합동 공연 펼쳐 
 

                                                        

에든버러 성의 전경. 사진=픽사베이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로 구성된 연합국이다. 런던에서 북쪽으로 629㎞ 이상 떨어진 에든버러 성(Edinburgh Castle)은 스코틀랜드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가파른 절벽이 성의 삼면을 둘러싸고 있는 천혜의 요새로 경사가 완만한 동쪽 입구로만 접근할 수 있다. 7세기 세워진 요새로 출발해 11세기 성으로 증축된 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벌인 수많은 전쟁사가 이곳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26회가 넘는 포위 공격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공격을 받은 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요새와 궁전, 군사 시설, 감옥 등 시대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활용됐다.

133m 높이 캐슬록에 세워진 요새로 시작

이 성의 역사는 7세기 초 켈트족 일파인 브리튼족이 고도딘(Gododdin) 왕국을 세우고 133m 높이 캐슬록(Castle Rock·바위 성)에 요새를 지으며 시작한다. 에든버러는 ‘구릉 위에 세운 요새’라는 의미의 딘 에이딘(Din Eidyn)에서 유래했다. 7세기 중반 잉글랜드 북부 앵글인들(5∼6세기 브리타니아로 이주한 게르만족의 한 갈래)이 세운 노섬브리아 왕국의 침략으로 고도딘 왕국은 멸망했다. 이후 에든버러는 300년 동안 앵글로색슨족의 지배를 받는다. 10세기에 이르러 스코틀랜드인이 이곳을 탈환해 11세기 요새를 성으로 증축했다. 에든버러 성은 12~16세기 건축물인 세인트 마거릿 예배당, 그레이트 홀, 크라운 룸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 성의 전체 건물과 대지 면적은 기록이나 문서로 정확히 나와 있지 않다.

스코틀랜드·잉글랜드 전쟁의 주요 배경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국경을 바로 맞대고 있기에 영토를 둘러싼 전쟁이 잦았다. 주로 군사가 강한 잉글랜드가 쳐들어왔다. 이때마다 에든버러 성은 주요한 전장이 됐고 결과에 따라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이 성이 처음 잉글랜드에 점령된 것은 1174년이다. 애닉 전투(1174) 때 스코틀랜드의 사자왕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에 패하면서 포로로 잡혀 이 성을 포기하고 프랑스의 팔레즈로 끌려가 헨리 2세의 신하가 된다는 조건 아래 풀려났다. 그 후 1186년까지 잉글랜드군이 이 성을 점령했다.

다시 스코틀랜드의 소유로 돌아온 후 스코틀랜드 왕가는 에든버러 성을 주요 거주지로 삼았다. 알렉산더 3세(1241~1286)는 스코틀랜드를 독립적이고 부유한 왕국으로 만든 왕이다. 그가 12살이던 1251년 잉글랜드 헨리 3세의 딸 마거릿과 맺은 결혼을 통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동맹 관계가 되면서 나아졌다. 하지만 1286년 알렉산더 3세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스코틀랜드 왕위를 놓고 귀족들 간 내분이 벌어진 후 1296년 3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왕위를 주장하며 스코틀랜드를 침공한다. 이때 에든버러 성은 단 3일간의 포위 공격으로 함락돼 1313년 로버트 1세(1274~1329)가 성을 되찾기까지 잉글랜드군이 주둔했다.

                    

작가 미상의 로버트 1세의 초상화. 사진=www.traveldudes.org


1307년 에드워드 1세 병사 후 스코틀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지배력은 약화됐다. 1314년 3월 14일 스코틀랜드 로버트 1세의 조카인 토마스 랜돌프가 이끄는 소수 정예부대가 야간 기습으로 잉글랜드로부터 성을 되찾았다.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의 재점령을 막기 위해 1130년대 데이비드 1세가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지은 세인트 마거릿 예배당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을 모두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20년 동안 이 성은 폐허로 방치됐다. 1334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를 침공해 이 성을 다시 한 번 점령했다. 1341년 귀족인 윌리엄 더글라스가 이 성을 되찾은 뒤 1356년부터 데이비드 2세가 성을 재건했다.

16~17세기에도 전쟁 잦아

스코틀랜드 건국 이래 최고 번영기를 이룬 제임스 4세(1473~1513)를 위해 1511년 성대한 연회와 국가 행사를 여는 그레이트 홀이 이 성에 완공됐다. 하지만 정작 제임스 4세는 2년 뒤인 1513년 처남 헨리 8세(1491~1547)가 보낸 영국군과의 플로덴 전투(1513)에서 전사했다. 부왕에 이어 제임스 5세(1512~1542)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 잉글랜드의 지배에 저항하던 아일랜드 지도자들이 제임스 5세를 아일랜드 왕으로 추대하자 헨리 8세는 자신을 스코틀랜드 왕이라고 칭하면서 전쟁을 도발했다. 1542년 11월 24일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 북부 컴벌랜드에서 잉글랜드군과 벌인 솔웨이 모스 전투에서 완패했다. 이에 제임스 5세는 실의에 빠져 앓다가 그해 12월 14일 병사했다.

                    

프랑수아 클라우가 1560년 그린 메리 여왕의 초상화. 사진=영국 왕실 컬렉션.


이때 에든버러 성에서 태어난 메리 공주(1542~1587)는 제임스 5세의 유일한 적손으로 겨우 생후 6일 된 신생아일 때 여왕으로 추대됐다. 헨리 8세는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와 메리의 결혼을 제안했다가 거부당하자 1543년 12월 전쟁을 재개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이 전쟁을 ‘난폭한 청혼’이라고 표현했다. 잉글랜드군은 1544년 에든버러 성을 점령했지만, 항복을 받아내지는 못했다.

1548년 메리 여왕이 프랑스로 피신한 뒤 프랑스의 왕세자 프랑수아 2세(1544~1560)와 약혼하자 잉글랜드는 1550년 프랑스와 불로뉴 조약을, 1551년 스코틀랜드와 노럼 조약을 체결하며 전쟁을 종결했다. 메리 여왕은 1558년 결혼했지만, 프랑수아 2세가 2년 만에 사망하자 1561년 스코틀랜드로 귀국한 뒤 단리 경 헨리와 재혼한다. 하지만 그마저 죽자, 제임스 햅번과 또 재혼해 이 성에서 1566년 제임스 6세(1566~1625)를 낳는다.

메리 여왕이 스코틀랜드 귀족들에 의해 잉글랜드로 망명해, 제임스 6세는 생후 13개월에 스코틀랜드의 왕이 된다. 1571년 5월 왕위 지지자들 사이에서 공방전이 시작돼 2년간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이 성 건물의 일부가 대포 공격에 크게 파괴되기도 했다. 1603년 후손이 없는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 왕으로 오른다.

이후 왕의 에든버러 성 방문은 뜸해졌지만, 전쟁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1639년에 알렉산더 레슬리 장군이 이끄는 코베난터군(청교도혁명 당시 의회파와 동맹한 스코틀랜드 세력)에 의해서 불과 30분 만에 함락됐다. 1689년에는 잉글랜드 윌리엄 3세의 의해 포위됐다. 1707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으로 합병되면서 양국의 전면전은 멈췄지만, 이 성에서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 성에서의 마지막 전쟁은 제임스 2세의 복위를 목표로 일어난 폭동인 자코바이트의 난(1745)으로 1745년 9월 자코바이트 군이 싸움 없이 에든버러 성을 점령했다.

매년 8월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

이후 이 성은 18세기부터 7년 전쟁, 미국 독립 전쟁, 나폴레옹 전쟁 당시 전쟁 포로를 가두는 감옥으로 활용됐다. 하지만 1811년 남쪽 성벽의 구멍을 통해 49명의 전쟁 포로가 탈출하면서 감옥 역할은 1814년 중단됐다가 제1·2차 세계대전 때 다시 감옥으로 쓰였다. 이곳에서는 2차 대전 직후 유럽인들에게 가해진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목적으로 1947년부터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이 매해 8월 열린다. 행사를 위해 이 성에 영국군 지역 사령부와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다. 이 중 백미는 전 세계 군악대들이 합동 공연을 하는 에든버러 타투 페스티벌(Edinburgh Military Tattoo Festival)로 한국 군악대도 지난 2013년 참가했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칼럼은 국방일보 2019년 12월 9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91209/2/BBSMSTR_000000100082/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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