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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에 눈을 가져다 씻었다

by 이시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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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책을 매듭지었을 때, 더는 아픈 글은 쓰지 않기로 했다. 무해한 단어를 골라 문장 곳곳에 살포시 내려놓고선 따뜻한 말을 건네자고 다짐했다. 내 글을 읽는 이들은 마음이 먹먹해진다거나 무거워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솔직하다는 평이 주를 이룬 책 후기가 나를 통과하던 날을 기억한다. 슬펐다는 말. 잘 읽었다는 말. 답답함이 잘 느껴진다는 말. 그리고 따뜻하다는 말이 이마를 덮어주었다. 나는 감사한 마음이 컸지만, 보이지 않는 커다란 부담이 따라왔다. 이런 글이 아닌 내가 글 쓰는 사람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아픈 얘기가 아니어도 누군가가 내 글을 좋아해 줄까. 불안을 덮고 자는 건 어느새 일상이 되어있었다.


그 후론 항상 글이 종이 위에서 왈츠를 추고 나면 차가운 점이 찍혀있었다. 조명이 꺼진 무대바닥에 손을 갖다 대면 냉기가 느껴졌다. 차가운 문장에 미끄러진 날이 점점 늘어갔다. 몇 안 되지만, 이러한 글을 좋아하는 이들이 생겼다.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장군처럼 의기양양해져 불행을 계속 찍어냈다. 어쩐지 내 주위로 안 좋은 일이 자꾸만 일어났다. 나의 가장 좋은 소재니 억지로 입 꼬리를 올려가며 글을 썼다. 보이지 않는 이들을 연민에 취하게 만드는 글을 계속 써나가자. 따뜻한 글을 쓰고 싶어 하던 나는 어디로 갔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에세이를 쓰든 소설을 쓰든 마찬가지였다. 글은 언제나 낭떠러지에 매달려 불안정해 보였다.


소외된 목소리는 숨죽여 울고 있었다. 뜻 모를 감정을 방치한 느낌. 실은 나를 내버려 둔 건 아닐까. 상반기 내내 무언가를 하기 위해 (또는 이루기 위해) 달려왔다. 그 누구도 나를 다그치지 않았지만, 스스로에겐 너무 엄격했다. 쓰지 않으면 실패한 하루였고 적지 않으면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겼다. 나는 알 수 없는 곳을 바라보며 제자리에서 반복해 걸었다. 가족한테는 언제나 바쁜 사람, 독자에게는 글 한 편 제대로 전달 못하는 사람, 수업을 듣는 사람에게는 사과를 달고 사는 사람이 나였다. 도돌이표는 나를 못난 사람으로 만들었다.


요즘엔 내가 너무 미웠다. 욕심과 손을 붙잡은 뒤로는 늘 그랬다. 왜인지 모르지만 내 모든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우울함은 나를 빙빙 둘러싸고 있었다. 고독함을 견디지 못해 인스타를 수시로 들락거리고, 누군가를 만나지 않는 날은 외로워 버틸 수 없었다. 그토록 바라던 건 누군가의 관심 한 줄이었다. 마치 관심 결핍에 걸린 듯이. 원체 타인의 반응에 민감했던 나는 더욱 예민해졌고 자꾸만 꿈을 맞이했다. 꿈속에선 나에게 손가락질하고 그럴 줄 알았다는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과 만났다. 불안을 이불 삼아 덮는 날이 많아질수록 이유도 없이 소중한 이들에게 섭섭함을 느끼고 서운함을 표했다. 나는 일상의 행복 속에서도 불행을 찾는 눈을 갖게 된 것이다.

나는 흐르는 물에 눈을 가져다 씻었다. 맑은 것들을 보고 싶었다. 아니, 밝은 것을 찾고 싶었기에 간절했다. 충분히 망가질 수 있는 사람은 반대로 충분히 고칠 곳을 알아차렸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두운 글을 안 쓰겠다는 것은 아니다. 목적이 불행이 아닌 글을 쓰고 싶다는 것이다. 어딘가에서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우리는 듣지 못할 뿐이다. 나는 그것을 글로 담아 책으로 엮을 것이다. 일상의 소리, 주변의 소리, 내면의 소리 등등 다양한 색채를 담은 여러 빛깔을 글을 써서 그림을 그릴 것이다. 따뜻한 눈이 내리는 날을 기다린다. 눈이 다 녹고 녹아서 땅에 잠드는 날에 봄이 찾아오겠지. 그땐 나의 다정 결핍이 조금은 나아지길 바란다.


2023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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