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의 기다림 끝에 선 현충원
시골에서 자란 어린 시절, 서울은 아스라이 먼 동경의 대상이었다. 6월 6일이 되면 TV 화면 속에서 국립서울현충원의 엄숙한 현충일 행사가 생중계되곤 했는데 그곳이 내게 서울이었다. 화면 저편, 하얀 군복을 입은 군인들과 검은 양복 차림의 인사들이 국기를 향해 경례하는 모습, 줄지어 선 묘비들이 바람결에 조용히 흔들리는 깃발과 함께 내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그때부터 마음속에는 국립묘지에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다’라는 소망이 생겼지만, 마땅한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채 생활과 시간이 나를 바쁘게 붙잡아, 그 약속은 50년 동안 미뤄져 왔다.
그리고 어제, 드디어 그 소망이 현실이 되었다. 진외가 사단 모임의 언니들 네 분과 함께 다섯이서 현충원의 문을 들어섰다. 오랜만에 방문을 예고한 아들과 일정이 겹쳤으나 나는 현충원을 선택한 것이다. 입구를 지나 현충문에 서니, 잔잔한 골바람이 솔잎 사이를 스쳐 지나가고, 깃발들이 규칙적인 리듬으로 펄럭였다. 발걸음은 저절로 느려지고, 마음은 조용히 가라앉았다. “아, 내가 지금 그 현충원에 서 있구나.” 50년 전 TV 속 풍경이 그대로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먼저 현충탑, 방문록 앞에 섰다. 떨리는 손으로 “오고싶은 오랜 바람이 이루어진 날, 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적었다. 글씨는 정성을 다했고, 거기에 마음을 담백하게 담았다.
묵념 종소리가 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나라를 위해 청춘을 바친 이름 모를 이들의 얼굴이 마음속에 스쳤다.
푸른 잔디 위에 반듯하게 늘어선 하얀 묘비들. 바람이 불 때마다 묘역 주변의 태극기들이 동시에 펄럭이며, 멀리서 매미 소리가 그 고요함에 섞여 들렸다. 대통령 묘역과 독립유공자 묘역, 그리고 수많은 장병 묘역을 걸을 때마다, 각 묘비가 한 사람의 이야기이자 한 가족의 역사라는 사실을 느꼈다.
눈을 감자, 이름 모를 이들의 얼굴이 마음속에 번졌다. 나라를 위해 청춘을 바친 이들이 여기 누워 있다는 사실이, 말없이 무겁게 다가왔다.
함께 온 언니들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다만 서로의 눈빛이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길 참 잘했다. 탁월한 선택이다.”라는 마음을 대신 전하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온 길과 나이는 달라도, 이 순간만큼은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돌아오는 길, 가슴속에 오래 남을 문장이 떠올랐다.
“50년의 기다림 끝에, 나는 비로소 이 땅의 뿌리와 마주했다.”
그리고 나 자신과 약속했다. 앞으로 이곳을,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꼭 안내하리라고. 오늘의 숙연함과 감사함을, 더 많은 이들이 함께 느낄 수 있도록….
국립서울현충원은 1956년 7월 15일 개원했다. 6·25 전쟁을 포함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전몰군경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국가적 성지다. 초창기에는 ‘국립묘지’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2006년 ‘현충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