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격조 높은 석봉처럼

친구에게 보내는 글

by Rudolf

석봉(石峯)

| 최치원(崔致遠, 통일신라, 857~?)


巉嵒絶頂欲摩天(참암절정욕마천)

海日初開一朶蓮(해일초개일타련)

勢削不容凡樹木(세삭부용범수목)

格高唯惹好雲烟(격고유야호운연)

點酥寒影糚新雪(점소한영장신설)

戛玉淸音噴細泉(알옥청음분세천)

靜想蓬萊只如此(정상봉래지여차)

應當月夜會羣仙(응당월야회군선)

| 높이 치솟은 산봉우리 하늘을 찌를 듯

| 바다에 오르는 해 한 송이 연꽃이로다

| 깎아 지른 절벽 평범한 나무 거부하고

| 격조 높아 오직 구름과 안개만 벗하니

| 우유 뿌린 듯 새하얀 눈으로 단장하여

| 고운 옥소리 울리며 맑게 흐르는 샘물

| 가만히 생각하니 봉래산 옮겨 놓은 듯

| 분명 달밤엔 신선들 모여 들어 놀리라



한 친구가 있었다. 외모가 한 눈에 보기에도 기풍이 있고 귀티가 나는 모습. 대학을 마치고 메이저 신문사 사회부 기자로 들어갔다. 그러나 1년 뒤 기자가 생리에 안 맞는다고 퇴사하려 하자, 신문사에서는 계열회사인 보험회사로 옮겨주었다. 친구는 약간의 교육을 받고 남해안 쪽 대도시의 지사장으로 발령이 났다. 그곳에서 1년. 이번에는 보험 아주머니들 닦달하여 실적 채우는 일에 진력을 느낀 나머지 사표를 던지고 나와 버렸다. 그 뒤부터 동양사상에 심취하여 반 떠돌이 생활.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의 부음이 날아들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상 법 없이 살 것 같고 무상무념과 절제와 중용의 모습을 보이던 그가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등진 것이다. 총명하고 어여쁜 딸 하나 이 세상에 남겨놓고. 그 친구는 군 생활 때 남을 도와주다 그것이 오히려 화가 되어 엄청 시달리기도 했다. 이것이 그 친구의 오점이라면 유일한 오점일 뿐, 주위 모든 이들이 한결같이 아끼던 선비 같은 인물이었는데. . . (이 사건을 극화시켜서 만든 작품이 브런치에 올린 중편소설 《아주 슬픈》)


그 친구는 스스로를 석봉과 같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한겨울 모진 풍파 한설에도 꿋꿋이 견디는 바위산.

연말로 접어들며 추위가 점점 심해진다. 항상 해맑고도 넉넉한 모습으로 미소 지어주던 그 친구의 모습. 한겨울 바위산이 된 그 친구가 이번 겨울 북풍한설에도 꿋꿋이 잘 버텨내기를, 그리하여 우리 친우들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기를 빌어준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만 그 친구가 추워진다. 무엇인가 들고 가서 눈 덮인 석봉에 둘러주고 싶다. 털목도리 하나 들고 가서 바위산 중턱에 두르고, 두툼한 털장갑을 마른 가지에 끼워주고 싶은 마음. . .


친구야, 이 겨울 잘 견디거라. 봄이 오면 바위산 눈들이 녹고 가지마다 새싹들이 돋아날 때 우리 함께 웃자꾸나. 교정에서 책가방 들고 나오며 떠들어댈 때처럼 그렇게 웃자꾸나. 친구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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