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 칠, 뺀, 갉!

세상만사 저 홀로. . .

by Rudolf

[1]


탕!

하루가 공으로 지나갔다. 허당. 허탕!


허탕 | 어떤 일을 시도했으나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는 것.


글은 안 쓰고 온종일 글 제목만 생각하다 보냈다. 억울한 느낌. (나는 제목을 먼저 정해 놓고 글을 쓴다. 그러지 않으면 글이 안 나오니까.)

사실 제목이 주는 효과는 대단하다.

프랑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가스통 루르(Gaston Leroux, 1868~1927)의 소설을 영화나 오페라, 연극 등으로 만든 《오페라의 유령》만 해도 그렇다. 그 작품의 원 제목은 ‘Le Fantôme de l’Opéra.’ 그 뜻은 ‘파리 오페라 극장의 유령’ 정도가 된다. 마치 ‘노트르담의 꼽추’처럼. ‘오페라 극장’은 파리에 있는 전통 있는 오페라 극장의 이름이다. 즉 고유명사인 것이다. (그래서 오페라의 첫 스펠링이 대문자이다.) 그러나 이것을 ‘오페라의 유령’이라고 고치고 나니 얼마나 단출해지며 심지어 극적(?)인 효과까지 나타나지 않는가. [사족] 가스통 루르는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다가 나중에는 저널리스트가 되어 해외를 여행하며 글을 썼으며,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장편 추리소설은 《노란 방의 비밀(Le Mystère de la chambre jaune)》(1907)인데, 이 작품은 추리소설사에 큰 족적으로 남겨져 있다.

글이 좀 빗나갔구나. 하지만 이로 인해 다른 생각들이 연이어 떠오른다.



[2]


칠!

칠판. 지각한 사람. 칠판에 쓰여 있는 내 이름!


칠판 | 일곱 개의 판자


사실은 지각한 게 아니었다. 그 일은 이렇게 된 것이다. 내가 교문을 들어서서 교사(校舍) 쪽으로 걸어가는데 저 앞에서 미술 선생님이 바삐 걸어오는 것이었다. 얼마 전 미술시간에 그 선생님에게 야단맞은 일이 있었다. 미술 숙제로 정물화를 하나씩 그려오라고 했는데, 나는 정밀화를 그려서 가져가고 말았다. 정물화를 정밀화로 알아들은 것이다.

그다음 주 미술시간에 나 혼자만 정성껏 그린 시계 속 톱니바퀴 그림을 냈다. 내심으로는 크게 만족해하며. 그러나 엄청 혼났다. 숙제를 잘못 해온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대신 그려준 것을 가져왔다고 하며. 정물화가 아닌 정밀화라도 자기 자신이 직접 그렸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정말로 공을 들여 아주아주 꼼꼼하고도 자세히 그렸는데.

‘으 씨, 내가 그린 게 맞는데…….’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 탓에 그 선생님의 머릿속에 내가 각인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서 며칠 뒤인 바로 오늘 마침 그 미술 선생님이 바삐 걸어오더니 다른 학생들도 많은데 하필 나를 보고는, 자신이 급한 일이 있어서 밖에 나갔다가 금방 돌아올 거라며 손가방과 둘둘 만 커다란 종이를 건네주면서 미술실에 갖다놓으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대답도 변변히 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받았다. 지퍼가 달린 고급 가죽가방과 무슨 그림인지 포장지로 둘둘 말아서 감싼 기다란 종이 원통 하나.

나는 그것들을 가슴에 안고서 머쓱한 마음으로 본관 뒤쪽 별관 안에 있는 미술실로 털레털레 걸어갔다. 그러나 문이 잠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앞에서 좀 서성이다가 마음이 불안해져서 별관의 현관 쪽으로 나가서 서 있었다. 혹 미술선생님이 오실까 해서.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났어도 오지 않는 것이다. 그 사이에 아이들은 교실로 다 들어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참 미련했다. 그냥 교무실로 가서 미술 선생님 책상에 올려다 놓고 교실에 들어갔으면 좋았을걸, 지난번에 야단맞은 것도 있고 해서 마음이 불안하면서도 그냥 기다린 것이다.

그러다가 수업시간이 막 시작되려는 즈음에 미술선생님이 본관 건물을 돌아서 느릿느릿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왜 여기에 있는 거냐고 묻는다. 하지만 나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렇게 해서 허겁지겁 교실에 들어가자, 담임선생님의 매서운 눈이 기다리고 있었다. 칠판에는 내 이름이 또박또박한 글씨체로 써 있었고. 그러나 선생님 글씨는 아니고, 아마도 반장이나 부반장이 쓴 것 같았다. (나중에 담임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미술 선생님은 그 가방을 교무실 책상에 갖다놓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덕에 나는 우주인이 되고 말았다.)

그날 저녁 집에 와서 나는 도화지에 판자 일곱 개를 그렸다. 옹이까지 집어넣어 꼼꼼하게. 그날 내가 늦은 시간은 7분이었다. 담임에게 야단맞은 시간은 빼고.

사라진 내 시간, 7분. ‘칠’.


[사실을 말하면, 내 이야기가 아니라 아는 사람의 이야기를 조금 각색한 것.]



[3]


뺀!

빼다, 빼니, 뺐다, 뺐어, 뺐니?


| ‘맨’의 호남지방 사투리


뺀질이라는 별명을 지닌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자신이 그런 별명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우리들(?)끼리만 그렇게 불렀으니까. 그 친구 뺀질이는 강의시간에 늘 늦게 들어오고 또 가장 빨리 나가곤 했다.

게다가 그 친구는 위쪽 머리칼을 길게 길러서 왼쪽 머리로 내려서 늘어뜨렸는데, 그러다 보니 머리 전체 모습은 마치 요란한 락 가수 같았다. 또한 머리칼 전체를 밝은 갈색으로 물들여서 어딘지 모르게 퇴폐적인 느낌도 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같은 과 친구들하고 거의 어울리지 않았으며, 수업도 자주 빠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조교 선배의 험한 행동으로 인해.

평소부터 후배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툴툴거리던, 입 걸고 덩치 이따만 한 황소 선배. 그가 그날따라 표정이 무거웠었는데, 뺀질이가 20분이나 늦게 실험실에 들어오자 한마디 날린 것이다.

“야, 뺀!”

그러나 자신의 별명이 뺀질이인 것을 모르는 그 친구는 당연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딘지 몸이 움찔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분위기상 자기한테 하는 말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르니까.)

“뺀!”

그 친구는 평소처럼 아무런 말도 없이 제일 뒤쪽 테이블로 걸어가서 앉았다.

“일어나!”

뺀은 실험실 가운을 천천히 걸치고서 노트 하나를 꺼내어 펼쳐놓았다.

“이 새끼가! 내 말이 안 들려?”

뺀이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야, 뺀!”

조교가 성큼성큼 뺀에게 걸어갔다.

“너…….”

뺀이 다리를 꼬고 앉아서 조교를 올려다보았다.

“너 뭐야?”

대학원생 조교는 뺀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뺀은 삼수를 한 뒤 1학년을 다니고 1년을 쉰 뒤 복학했던 것이다.

“뺀!”

그때 뺀이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등 없는 둥근 의자가 옆으로 벌렁 넘어가고 말았다. 쿵!

그런 뒤 황소와 뺀은 서로를 마주보고 섰다.

황소에게서 콧김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뺀 역시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어디서 눈깔을 떠!”

황소가 얼굴을 들이밀면서 한 손을 내밀며 밀치려는 동작을 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뺀이 움칠하며 몸을 뒤로 뺐는데, 하필 그곳에는 물이 가득 든 양동이가 있었다.

뺀의 뒤꿈치가 그 양동이를 차고 말았다. 그런 뒤에 벌어진 광경.

물이 엎질러진 건 별것 아니다. 힘은 들어도 대걸레도 닦으면 되니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뺀이 물을 밟으며 순간적으로 미끄러지며 넘어졌는데, 그것이 하필 오른쪽이었다. 그 바람에 머리 왼쪽을 덮고 있었던 머리칼이 오른쪽으로 훌러덩 넘어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서 드러난 왼쪽 옆머리.

그것은 보기 흉한 검붉은 색으로 옆머리 전체를 덮고 있는 커다란 반점이었다. 그곳에는 머리카락이 하나도 나 있지 않았고, 마치 화상 흉터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 머리에 대해서는 우리 학과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다. 아니, 짐작하고 있었지. 아무도 그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눈썰미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나까지도 짐작하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뺀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벌떡 일어났다. 주먹은 불끈 쥐어 있었다. 조교는 당황한 얼굴로 몸이 굳은 채 그냥 서 있었고.

그 광경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는 순간 어떤 장면이 예측되었을 것이다. 민하기로는 국제급인 나까지도 어떤 클라이맥스 같은 장면이 떠올랐으니까.

그리고 그 예측(?)대로 뺀은 주먹 쥔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나 그 손은 실험실 탁자를 잡더니 몸을 벌떡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냥 걸어갔다. 조교 옆을 지나, 물에 젖은 바지는 내려다보지도 않고서, 앞만 똑바로 본 채. 게다가 오른쪽으로 넘어간 머리칼을 쓸어내리지도 않고 그냥 걸어간 것이다. 처벅처벅. 자기 소지품도 챙기지 않고 뺀은 그렇게 실험실을 나가 버렸다.

그 뒤 뺀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휴학을 했다나, 자퇴를 했다나 하는데 아무튼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20년쯤 뒤, TV에서 아프리카의 어느 가톨릭 수도원에서 한국의 신부들이 고아들을 돌보는 뉴스가 나왔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한 신부가 머리칼을 짧게 깎은 모습이었는데, 그의 왼쪽 옆머리에는 크게 흉이 지어 있었으며, 또한 그곳에는 머리칼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그 얼굴은 바로 옛 뺀과 꼭 빼닮은 것이었다.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나는 TV 화면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핸드폰 버튼을 누르고 귀에 갖다댔다.

“야, 너 지금 TV 좀 켜봐! 그 뺀, 뺀이 말이야……!”


[이것도 사실은 어디선가 얻어들은 이야기를 많이 많이 각색한 것.]



[4]


갉!

지난 갉에 삵이 맑에 올라와 닭을 물어가면서 드러운 핡밝만 남겼다고!


| 가을 (강원도 심심산골에서 주로 쓰던 사투리)

| 나루의 강원도 사투리

| 병아리 아빠(?), hen, cock, chicken

| 마루의 사투리

| 발자국의 사투리

| 살쾡이

| 자루의 강원도 사투리

| 흙의 함경도 사투리


숲속방울꽃1.jpg


[사투리 열전]

가가 가가? | 그 애가 그 애냐?

가가 가가 가가? | 그 애가 가씨 성을 가진 그 애냐?

가가이소 | 가지고 가이소.

가다나라 | ‘가나다라’를 잘못 말한 것 아님. 가두어 놔라.

바바라 | 바바리 아님. (이것 좀) 봐 보아라.

바끄르 | 밖으로

세빠다그 | 혓바닥

쉔밥 | 쉰밥

어풀 | 앱(app)이나 어플리케이션(application)이 아니라 강원도 사투리로 ‘빨리’

언풀 | 언론 플레이 아님. 빨리.

이따구로 | 이렇게

질깐 | 길가

추물 흘레다 | 침을 흘리다

언나 | 어린이

해던나 | 갓난아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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