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계(仙界)에서 훔쳐온 바로 그 바람
여름 한철, 나무그늘 아래에서 쥘부채 손에 쥐고 살살 부치며 먼 산 바라보기 하는 품새가 어떠신지. 그리고 여인네들 모인 숲속 정자에서 앞뒤 창호 모두 활짝 열어젖뜨린 채 과일 화채(花菜) 앞에 두고 접부채 활활 펴서 솔솔바람 일으키며 한담 나누는 모습은 또 어떠하고. 이러할 때 그 바람은 신선도 부럽지 않은 선계(仙界)의 선풍(仙風)이라 할 수 있다.
흔히 휴대용으로 좋은 부채를 쥘부채 또는 접부채라고 한다. 손에 가뿐하게 쥔다고 해서 쥘부채, 또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다고 해서 접부채라고 부른다. 한자로는 접선(摺扇) 또는 첩선(疊扇)이라 한다. 접(摺)은 접는다는 뜻, 첩(疊)은 겹쳐진다는 뜻. 한편, 깃털이 달린 부채나 태극선(太極扇)은 접었다 폈다 할 수 없다.
그리고 쥘부채를 혹 중국에서 넘어왔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학설에 의하면 한국이나 일본에서 만들어져 중국으로 흘러들었다고 한다. 중국의 부채는 원형이나 비파의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접을 수 없었다. 또한 칠접선(漆摺扇)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옻칠을 한 대나무 속살로 부채와 살을 만들고 그 위에 한지를 덧붙여서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한편 합죽선(合竹扇)은 대나무 겉대 두 쪽을 맞붙여 부챗살을 만든 것을 말한다.
봄이 지나고 무더위가 시작될 무렵인 단오가 되면 임금님은 전국 각지의 지방 관아에 부채를 만들어 올리라고 영을 내렸다. 즉 각 지방의 명장들이 부채를 만들어 임금님에게 올리는 것이다. 한편, 궁에서는 임금님이 신하들에게 부채를 선물하기도 했다. 옛적에는 단오, 즉 우리말로 수릿날인 음력 5월 5일은 한국 전통의 3대 명절에 속했다. 설과 추석 사이에 단오를 정해 놓고 제사도 지내며 백성들에게 여름나기도 격려하는 것이었다. 수릿날이 되면 여인네들은 창포로 머리를 감기도 하고, 남정네들은 씨름을 즐겼으며, 마을마다 탈춤과 가면극을 펼치면서 한바탕 즐기며 온갖 시름을 달래곤 했다.
단오 날에는 임금님뿐만 아니라 웃어른이나 신세 진 분들을 찾아가서 부채를 선물하기도 했다. 이때는 특히 백선(白扇, 아무 문양도 없는 흰 부채)은 물론 부채 위에 정감 깊은 수묵화나 채색화를 그려서 주고받곤 한 것이다.
부채, 특히 쥘부채 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없을까? 남정네 앞에서 얼굴을 드러내기 어려운 여인네들이 쥘부채 슬며시 펴고 긴한 말 전할 때, 아니면 제갈공명이 전투를 앞두고 쥘부채 활짝 펴고서 부하 장수들에게 은밀한 비책을 전할 때, 또는 한밤중 초롱불 켠 뒷방에서 합죽선 너머로 음모의 말을 전하는 음침한 눈길 같은 것들…….
한여름 밤, 모시 적삼 속으로 흐르는 땀을 식히며 수박 먹는 맛. 그리고 대청마루 끝에 모여앉아 여름밤 하늘 올려다보며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먼먼 옛이야기 듣는 것. 또 하나, 쥘부채 활짝 펴고서 느긋나긋 흔들면 아릿저릿하게 공기를 흩트리며 스스슥 사사삭 흘러나오는 신선의 바람. 이것이 바로 여름철 밤 3대 묘미가 아니더냐.
우선 쥘부채 활짝 펴실 것. 그 다음엔 부채 아래쪽 댓살 사이로 슬쩍 보이는 여름에 눈길 한번 흘끗 주고서……, 이때 은근한 미소 흘리면 더없이 좋겠다만, 그까이것 여름철 하늘 둥실 뜬 뭉게구름에 은근슬쩍 실려 보내고서, 아……, 흘러간 옛님도 한숨 한번과 함께 그냥 유행가에 실어 날리시고요……, 건넛말 늦총각 혼례식 때 신랑신부가 얼굴을 가릴 때 쓰는 앙증한 사선(紗扇)처럼 부끄럼 가득 담은 시선으로 먼먼 기억에 초점을 맞추면서 스을쩍 부채를 흔드는 것이다.
그리하면 손바람이 부챗살 사이로 스며들어 옛이야기를 타고서 황산 남산 솔잎 사이로 흐르면서 어렸을 적 기저귀 냄새 풍기며 스스르륵 여인네 목덜미를 타고 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다음으로 등줄기 아래로 흐르는 더운 땀에 서릿바람 불어넣어 등골을 타고서 시냇가 솔솔 물줄기 같은 한기가 스윽 지나가는 것이다.
아하라! 이것이 무엇이랴? 백구 떠도는 남양 바닷가 바람이더냐, 아랫말 총각 선본 뒤 참지 못하고 흘리는 웃음이더냐? 아니면 구중궁궐 속 단 한 번도 나랏님 얼골 보지 못한 말단 시녀에게 눈길 보내는 왕세손님의 은근한 미소더냐? 그것도 아니면 혹 테두리 다 삭은 둥그런 방구부채 너머로 슬근슬근 눈짓하는 십년 과부 개똥어멈의 속심이더냐?
꽉 막혔던 영기 정기가 한날 한시에 탁 터져버리고 등줄기를 타고서 아래위로 흐르는, 속살 속뼈까지 다 얼려버릴 듯 뼛골 깊숙이 파고드는 시원 서늘 얼얼한 바람, 바람, 바람.
아라차! 이것이 바로 선계에서만 분다는, 불덩이도 식히고 아궁이도 얼리며, 삼척동자가 선계에서 도망쳐 나올 때 몰래 사타구니에 감추고서 가지고 나왔다던 바로 그 바람이 아니겠는가!
옳다구나, 이놈이 신선의 바람, 바로 그것이로다!
신선(神仙)바람 불어라
여름날 신선놀음 쥘부채 쭉내밀어
바람아 불어오라 하늘천 호령하니
산천이 소란스란해 어디선가 화르락
한조각 구름타고 먼발치 살랑바람
신선들 노닐다가 버려둔 손쥘부채
한바탕 화들흔드니 바람소리 요란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