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odubique quodsemperquodab omnibus cred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있고, 누구나 믿는 것
[시편 89편 9절]
(개역개정 한글 성경) 주께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잔잔하게 하시나이다
(라틴어 성경) anni nostri sicut aranea meditabantur (우리 인생의 시간들을 거미줄처럼 여겨야 할지니라)
라틴어 성경에서는 ‘인생의 시간은 곧 거미줄’이라고 했다. 여기에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이것을 짧게 요약하면 ‘인생은 덧없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인생은 나그네길. 이 사실을 모르는 이 없다. 유행가에도 나오니까.
즉 위 라틴어 성경의 의미는 거미가 아무리 실을 자아내도 결국 남는 것이 없듯이 우리네 인생 역시 그러하다는 뜻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살이는 어떠해야 하는가? 성경에서는 그렇듯 덧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절대자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교훈을 제시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바라며 살아가는 것일까?
quodubique quodsemperquodab omnibus creditum est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있고, 누구나 믿는 것
무엇일까? 이 명제에 부합하는 것 말이다. ‘인류는 합리주의적인 사고 때문에 길을 잃었다’고 하는 말이 있다.
아차, 여기에서 합리주의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Rationalism, 合理主義.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Daum]의 백과사전에 따르면 합리주의는 ‘비합리적이고 우연적인 것을 배제하고 이성적이며 필연적인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라고 한다. 이는 유럽 대륙에서 나온 인식으로, 영국의 경험론과는 대치된다고 할 수 있다. 즉 경험이 아닌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본성의 하나인 이성을 중시하라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과학적이고도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성주의가 되겠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에서 합리주의라고 하면 오히려 이성적인 사고가 아니라 경험론에 가까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경험칙에 의한 합리적인 사고방식.
이쯤 되면 뒤죽박죽이 된다. 하지만 이 글은 이성주의와 경험주의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어서, 이 어설픈 철학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고자 한다. 그리고 이 글의 제목에서 제시한 문구, 즉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있고, 누구나 믿는 것’이라는 명제로 돌아가야겠다.
이는 한마디로 보편적 진실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사과는 아래로 떨어진다. 적어도 뉴턴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하지만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 닐 암스트롱(Neil Alden Armstrong, 1930~2012)에게는 이 사실이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무중력 우주공간을 여행했으니까. 그곳에서도 사과가 아래로 떨어지던가?
그렇다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말은 어떠한가? 좀 알쏭달쏭하다. 한 개체는 죽지만, 그 개체는 자신과 똑같은 것을 남긴다. 이들이 또 남기고, 남기고, 남기고 해서 한없이 이어진다. 이론상으로는 무제한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명제를 만들면 ‘생명은 무한하다’는 문장이 될 수 있다.
생명에 대한 정의나 논쟁은 어느 경우에는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창조론이나 진화론이나 우연론이나 따지고 보면 모두 똑같다. 그 진실을 ‘아직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면에서는 말이다. 물론 어느 특정 신념을 지닌 이들에게는 각자 나름대로 추구하는 진실이 있겠지만, 제목에서 제시한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있고, 누구나 믿는 것’에서 적어도 하나에는 걸릴 수 있다. 예를 들면 ‘누구나’에게. 진화론자와 창조론자는 ‘누구나’가 아니다. 벌써 둘로 나뉘었으니까.
아, 나는 벌써 후회한다. 아직 이 글의 서두도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말이다. 수천, 수만 년에 걸친 세월 동안 수많은 정치, 철학, 과학, 역사 등등의 학자들이 논하고 논해도 아직 통일된 개념을 정립하지 못한 생명, 즉 ‘인생’을 명제로 들고 나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 변명이 되는 것은 나는 ‘인생’을 논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찌 나 따위가 감히…….) 그저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있고, 누구나 믿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한번 생각해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이러한 명제를 던져본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물론 정답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해서는 아무도 자신하지 못할 테니까.
따라서 여기에서 나는 내 나름의 고집을 부려 한 가지를 제시한다. 부디 나무라지 마시고, 또한 ‘abracadabra(헛소리)’로 치부하지도 마시고, 더더욱 ‘ad hoc(임기응변)’일 뿐이라고 넘기지도 마시길 부탁드린다. (여기에 위에서 제시한 명제를 한번 더 소개한다. 이번에는 한글이 먼저, 라틴어가 나중.)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있고, 누구나 믿는 것
quodubique quodsemperquodab omnibus creditum est
맞다,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사랑은 무엇일까? [다음Daum]에 의하면 ‘사랑’을 다음의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1] 어떤 상대를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2] 한옥에서, 집의 안채와 떨어져 바깥주인이 거처하며 손님을 접대하는 곳
물론 여기에서 2번 항목은 제외. 그렇다면 남는 것은……. 그렇다, 바로 사랑. 라틴어에 의하면 그 사랑에는 적어도 9가지가 있다.
관능적인 사랑인 에로스(eros)
친구 간의 사랑인 필리아(phillia)
바람둥이 사랑인 루두스(ludus)
질투나 집착 또는 독점적인 사랑인 마니아(mania)
자기애를 뜻하는 필로시아(philautia)
감정보다 이성적인 사랑인 프라그마(pragma)
부부나 가족 간의 사랑인 스토르게(storge)
신적인 사랑인 아가페(agape)
정신적인 플라토닉(platonic) 사랑
이보다 더 많은 사랑의 정의가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그 근본은 똑같다. 우리의 가슴이,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 어떤 경우든 변하지 않고, 어떤 경우든 유효하며, 또한 모든 이에게 유익하고, 어디에서나 통하며, 누구에게나 동일하고, 국적, 나이, 성격, 성별, 시대, 인종 불문하고 동일한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말에는 어떤 사랑이 있을까?
가족애, 독점애, 동료애, 동성애, 모교애, 부모애, 부부애, 불륜애, 순애(보), 이성애, 자기애, 자식애, 조국애, 직장애, 편애, 형제애, 이애/저애/그애(아차, 이건 아니고)……. 우리말로 된 사랑도 있다. 외사랑, 첫사랑, 풋사랑……. 혹 이것도 포함될까 모르겠다. ‘사랑, 사랑, 내 사랑’.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야겠다. 짝사랑을.
아, 그러고 보니 또 한 가지 사랑이 더 남았다. 지독한 욕심꾸러기 사랑 말이다. 조선시대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시인이 남긴 사랑.
나보기 좋다하고 남의님을 매양보랴
한열흘 두닷새에 여드레만 보고지고
그달도 설흔날이면 또이틀을 보리라
(결국 남의 사람을 매일 훔쳐보겠다는 거잖아. 그러나 어쩌랴. 마음이 그렇게 가는걸. 그것이 바로 사랑인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