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구려

by Rudolf

책덮고 窓을여니 江湖에 배떠있다

往來 白鷗는 무슨뜻 먹었는고

앗구려 功名도말고 너를좇아 놀리라


우리 옛 시조의 기본구조는 초장, 중장, 종장이 각각 ‘3/4/3/4, 3/4/3/4, 3/5/4/3’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반드시 이 구조를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위의 시조에서 보듯이 2행인 중장이 ‘2/3/3/4’로 되어 있어서 규칙(?)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예를 들어 아래에 소개하는 황진이의 시조 역시 ‘3/5/4/4, 2/4/4/4, 3/7/4/3’로 되어 있어 전형적인 틀과는 한참 어긋나 있다. 하지만 시조의 멋과 맛을 즐기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동짓달 기나긴밤을 한허리를 베어내어

春風 이불안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날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사실 이 글은 시조에 대한 것이 아니다. 제일 앞에 소개한 시조를 남긴 주인공과 그 당시 참담한 조선의 상황을 언급하기 위해서 도입한 것에 불과하다. [위의 시조에 등장하는 ‘앗구려’는 감탄사로서 ‘아서라’라는 뜻으로 보면 된다. 그리고 ‘往來白鷗(왕래백구)’는 갈매기가 오락가락 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 시조를 지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정온(鄭蘊, 1569~1641)은 72세에 타계했다. 호는 두 가지로서 동계(桐溪)와 고고자(鼓鼓子). 정온은 임진왜란 때 부친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를 돕기도 했고, 광해군 연간에는 제주도로 유배되어 위리안치되기도 했으며, 그때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를 삼고자 중국 고대에서부터 남송(南宋)에 이르기까지 성현들의 명언을 수록한 《덕변록(德辨錄)》, 《동계집(桐溪集)》 등의 저서를 지었다고 한다. 또한 이괄의 난 때는 이조참의로서 임금의 딸을 공주로 피난시켰고, 병자호란 때는 이조참판으로 남한산성에 들어가 척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으로 내려가 은거하다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향년 72세. 당시로써는 무척 장수한 셈이다. (중국 남송의 애국자 육유(陸游)의 경우 85세까지 산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요즘 못지않게 장수한 사람들이 꽤 있었던 듯하다.)

음력으로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때 정온도 함께 그곳에 들어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최명길을 비롯한 이들이 화평교섭을 진행하자 이들을 매국노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최명길 일당의 소행을 보고 자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이후 정온은 다시는 조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들것에 실려 경상도의 어느 심심산골로 들어가서 흙담 초가집에 칩거하며 지내다가 5년 만에 숨을 거뒀다. 또한 흙으로 침상을 만들어 모리구소(某里鳩巢, 어느 시골의 비둘기 집)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산비탈을 직접 밭으로 일구어서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기장과 조를 심어 자급자족했다고 한다.



한편,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나서 얼마 안 된 음력 1636년 12월 20일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혀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전라도 각 고을에서 급히 군사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전라감사 이시방과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 1586[선조19]~1642[인조20])이 이끄는 6천 명, 그리고 화엄사 승려를 중심으로 한 승병 2천 명, 도합 8천 명의 전라도 근왕병이 구성되어 두 부대로 나뉘어서 각각 전주, 여산, 공주, 직산, 안성, 양지를 거치는 길과 또한 여산, 성주, 진천, 오산, 과천을 거치는 길 등 두 곳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급히 올라가게 되었다. 이들은 당시 천하무적이던 청나라 군사들을 상대로 처절한 전투를 벌였는데, 그중에서도 김준룡의 활약이 지대하기에 이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한다.

당시 조선군은 청나라 군대에게 연전연패하며 모든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다. 이때 전라도 근왕병을 이끌고 청군을 대패시킨 장수가 바로 김준룡이었으며, 이를 광교산 전투라고 한다. 현재의 지도를 살펴보면, 그 전투 현장에서 서쪽으로는 파장저수지, 동쪽으로는 광교저수지와 하광교 교류지 그리고 광교산 형제봉(582m)이 나란히 펼쳐져 있으며, 남쪽으로는 50번 지방도와 그 아래로 광교저수지가 보인다.

음력 1637년 1월 2일 전라도 근왕병이 경기도 양지에 도착하자 이시방은 김준룡에게 병력 2천 명을 내주며 급히 남한산성 쪽으로 가도록 했다. 같은 날 청의 군사들은 충청도 험천에서 충청도 근왕병을 물리친 뒤 김준룡의 선봉대가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곧바로 광교산 동쪽에 군사들을 배치해서 김준룡의 후속부대가 오지 못하게 차단한 뒤 곧장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광교산으로 진군했다. 이렇게 해서 1월 5일(양력 1637년 1월 30일)부터 처절한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당시 기록에 동이 틀 때부터 밤 11시경까지 싸웠다고 나와 있는 것을 보면 매우 치열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서 3일째 되던 7일, 이날은 폭설에 안개까지 짙은 날씨였음에도 전투는 계속 이어졌다. 안개가 많이 끼어 서로 간에 시야가 매우 제한적인 가운데 초반에 근왕군은 패색이 짙었으나, 앞에서는 근왕병이 총포로 집중사격하는 한편 궁수와 대나무 방패로 무장한 등패수가 뒤로 돌아가 협공을 하여 마침내 청군을 몰아내게 된다. 이때 청나라는 당시 그 근처에 집결한 3만 명 중 정예 3,500명을 동원했으며, 조선은 급히 모집한 근왕병 2천 명과 의병 1,700명이 전부였다. (근왕병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급조한 병력이어서 모든 것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날 청나라의 사령관인 양고리(揚古利, 원이름은 양굴리)가 동굴에 숨은 조선군 저격수의 총에 맞아 사망했는데, 양고리는 조선과 청의 전체 전투 중 가장 고위급 인사였다. 청의 시조인 태조의 사위이며 조선을 침략한 태종의 매부인 데다 당시 청나라의 최고 명장이었으니까. 이로 인해 청나라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태종은 양고리의 시신이 돌아오자 교외에까지 나가 맞이한 뒤 청 태조(누르하치)와 배장(陪葬), 즉 왕의 능 옆에 묻은 뒤 장사 때도 직접 제사를 지냈다.

한편, 이날 수훈을 세운 김준룡은 어처구니없게도 광교산 전투에서 퇴각했다는 누명을 쓰고 유배되고 말았다. 나중에 제대로 된 사실이 밝혀져 사면되기는 했지만, 당시 조선의 당파싸움으로 인한 폐해는 이 정도까지 심했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이 전투에서 청나라는 병력의 반 이상을 잃고 광교산 동쪽 10리까지 물러났다고 한다. (한편 광교산(光敎山)은 고려시대에는 광악산(光嶽山)으로 불렸다.)

청나라 태종인 홍타이지(皇太極)는 조선 침공 8개월 전 4월에 국호를 후금(後金)에서 청(靑)로 바꾸고 자신을 황제로 칭했다. 또한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는 12만 명이 넘었다. 기병 7만 명, 몽고 보병 3만 명, 그리고 항복한 명나라 병사 2만 명 등. 한편 이 전쟁으로 인해 조선의 폐해는 극심했었다고 한다.


어쩌다 보니 문인 정온에서 시작하여 무인 김준룡으로 이 글이 이어졌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남한산성이라는 역사적 무대에서 역할은 다르지만 각자 나름의 몫을 했다. 한 사람은 성 안에서, 또 한 사람은 성 밖에서. 이들 말고도 수많은 사람이 당시 남한산성 내외에서 역사를 써내려갔다. 우리에게는 슬픈 역사이긴 하지만. 이 전투에 대해서는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제작한 ‘병자호란, 광교산 전투’라는 짧은 동영상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다. 현재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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