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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Jun 29. 2023

외규장각을 아십니까. . . ?

기록에 진심인 민족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새로운 주소로는 강화읍 북문길 42에 있는 고려궁지(高麗宮趾). 이곳은 1964년 6월 10일 사적 제133호로 지정되었으며, 바로 그곳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이 설치되어 있다.      

    규장각은 정조대왕이 즉위하던 1776년 궁궐 안에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역대 왕들의 친필이나 서화 등을 보관하고 관리하던 곳이었으나 차츰 학술기관으로 변모해 갔다. 사실 그 이전에 조선의 세조 때 일시적으로 개설된 적은 있으나 곧 폐관되었고, 그 뒤 숙종 때 복원시키려 했으나 유신들이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의도라 하며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정조대왕이 즉위하던 해에 환관이나 외척들이 횡포부리는 것을 막기 위해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규장각은 단순히 서고만의 역할을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조대왕은 규장각의 설립에 대해 승정원이나 홍문관의 관료 선임 때 비일비재했던 폐습을 막는 것은 물론이요 정치혁신을 이루기 위한 의도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이 일을 추진했다.  

    그리고 별관에 해당하는 강화사고(江華史庫, 강화도 역사 서고)를 지었다. 당시 그곳에 8만여 권이 보관되었는데, 이것이 현재 3만여 권에 달하는 규장각 도서의 원류가 되었다.     


[고려궁지 내부에 있는 종각]


정조대왕 연간에 규장각을 통해 배출된 학자들은 당대의 문예부흥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강력한 왕권이 확립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대왕 이후 규장각이 그대로 남겨지기는 했으나 여러 이유로 차츰 그 기구와 기능이 축소되어 나중에는 왕실도서관 정도로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정조대왕 당시 규장각은 정부 내의 어떤 기관보다 비중이 큰 기구였으며 정치적, 문화적 중심체였다고 볼 수 있다. 설립 전에 노론 벽파를 중심으로 해서 극렬한 반대가 일었으나 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당대의 정치혁신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즉 규장각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단순한 서고나 도서관과 같은 기능만 담당한 것이 아니라, 당대 정치문화 개혁의 중추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당시까지 이어져 오던 당파정쟁을 혁파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한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원래 ‘규장(奎章)’이란 임금이 쓴 글씨나 시문(詩文) 등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러한 것들을 보관하는 제도를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유럽의 문예부흥인 르네상스(Renaissance)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문화를 부흥한다는 의미를 가지듯이, 정조대왕의 규장각 설치는 한국의 문예부흥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르네상스가 14~16세기에 일어난 데 비해 조선에서는 2세기 가량이 늦은 18세기에 시작된 점이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당시의 훈구적인 사상이 강했던 조선의 환경을 감안한다면 서책과 도서관 제도, 곧 규장각을 중심으로 해서 일으킨 정조대왕의 문예부흥은 우리의 근대사에서 큰 의미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외규장각     


[외규장각의 외부 모습]


강화도 고려궁지(高麗宮趾) 부지 내에 있는 외규장각(外奎章閣)은 조선 정조대왕 7년인 1782년에 세워졌다. 참고로 본 규장각은 1776년 3월에 창덕궁 내부에 설치되었는데, 외적의 침입 등으로 본 규장각이 훼손될 경우를 생각해서 강화도에 별관 식으로 설치한 것이다. 강화도는 고려시대에 39년간 수도가 되기도 하는 등 역사문화가 깊이 보존되어 있는 보물섬과 같은 곳이다. 게다가 강화도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고려나 조선의 문화유적이 곳곳에 잘 보존되어 있으며, 127점의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강화도는 외적의 침입을 거의 받지 않아 이와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위의 사진은 외규장각과 관련이 없으며, 인천 청라 신도시 호수공원에 세워진 전통가옥의 문]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이것은 정조대왕 스스로가 지은 자신의 호다. ‘일만 개의 시냇물에 비친 밝은 달의 주인’이라는 뜻의 이 문구는 자못 의미가 심장한 구석이 있다. 일만 개의 시냇물에 달이 비쳐 있지만, 실상 그 달은 오직 하나이다. 즉 하늘에 떠 있는 달, 바로 군주는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온 지상에 군주의 빛이 골고루 비쳐 세상을 환히 밝힌다. 이것이 바로 개혁군주 정조대왕의 사상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밝으면 세상도 밝아진다. 이는 국가와 백성을 밝은 빛으로 이끌어 나가겠다는,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늘에 떠 있는 달은 밝고 맑고 환해야 한다. 달이 어두우면 어찌 세상을 밝힐 수 있겠는가. 온 백성이 바라보는 천상의 달은 국가의 표상일 뿐 아니라, 정조대왕 스스로가 밝은 달이 되어 개혁의 선두에 서서 국가를 이끌겠다는 강한 표명인 것이다.


[고려궁지 내부의 옛 궁궐]


그리하여 이 사상은 군민일체론(君民一體論), 즉 임금과 백성은 하나라는 사상을 낳고, 여기에서 탕평책(蕩平策)이 나오게 된다. 당시 정조대왕은 ‘민국(民國)’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즉 백성이 주인인 나라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가장 낮은 신분이었던 노비에게도 국민의 권리를 주기 위해 노비제도의 혁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불행히 정조대왕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더 이상의 혁신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즉 ‘민국(民國)’ 정치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국호가 대한‘민국’이다. 봉건제가 한창이던 당시에 국민재권, 곧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꿈꾸었던 정조대왕. 그의 사상이 시작되고 또 강한 추진력을 가게 된 시발점이 바로 규장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조대왕은 한마디로 당시 어두웠던 조선에서 문예부흥을 일으킨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불행히도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그 뒤 혼란스런 정쟁만 이어진 끝에 조선의 역사는 일제에 종속되고 말았다.      


[고려궁지 내부의 정원 모습]


강화도 외규장각에는 6천여 권의 서책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66년 병인양요 때 자국 신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침입한 프랑스군의 침입으로 인해 외규장각 건물과 함께 소장 도서 대부분이 불태워 소실되고 말았다. 게다가 의궤를 비롯해서 중요한 도서 300여 권까지 프랑스군이 약탈해 갔다. 그러나 그 뒤 2002년 외규장각 건물을 복원하고, 그로부터 9년 뒤인 2011년 5월 27일 프랑스가 의궤 294권을 비롯한 297책을 반환하여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의궤(儀軌)란 조선시대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행사나 잔치 등이 있을 때 그 행사에 따른 모든 인원, 내용, 비용, 행렬의 배치나 의식과 절차 등 제반 내용을 정리해서 기록한 것을 말한다. 이것을 조선왕조의궤라고 하며, 유네스코에도 ‘조선왕조의궤’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다.                     


지붕 없는 박물관


한편, 강화도는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도 알려져 있다. 강화도 전체에 127점의 지정문화재가 등록되어 있으며, 외적의 침입을 거의 받지 않은 덕에 우리 역사 문화가 거의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 들어서서 강화도는 좀 소외되어 있었던 면이 있다. 아마도 휴전선 가까이에 있기 때문일 듯하다. 강화도 북단에 있는 평화전망대에 올라가면 얕은 바닷물 바로 건너편이 북한 땅이다. 글자 그대로 손에 잡힐 듯한 곳에 넓은 개활지가 나타나고 그 너머로 북한 땅이 이어진다. 강화도와 북한 땅 사이가 강인지 바다인지 모르겠지만 수심이 야트막하여 마음만 먹으면 헤엄쳐서도 가뿐하게 건널 수 있는 거리이다. 바로 이러한 환경 탓에 그동안 강화도가 다소 외면받아 온 것도 사실이다.


[외규장각 내부에 그려져 있는 정조대왕 행차도]

[위의 사진은 외규장각과는 관련이 없으며, 그냥 옛 서당에서처럼 우리도 열심히 공부(?)하자는 의미. 매 맞는 아이는 마치 필자 같은 느낌]


아래 사진은 강화도 초지대교 근방에 있는 초지진(草芝鎭)의 성문이다. 초지진은 1716년 숙종 때 세워졌으며, 1871년 고종 8년에 미국 해병대 450명이 상륙하여 전투를 벌인 곳이다. 이때 40여 문에 달하는 대포가 파괴되고 결국 조선군이 패퇴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신미양요(辛未洋擾)라고 부른다. 초지진 성곽 안에는 당시 사용하던 대포 두 문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4년 뒤 1875년에는 일본 함정이 침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반도 전체 지도를 펼쳐놓고 보라. 조그만 반도 한가운데를 선으로 긋는다면 딱 강화도에서부터 시작될 듯하다. 그곳에서부터 동서를 가로질러 동해안으로 나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강화도는 한반도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게다가 섬이었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도 상대적으로 덜 받았다. 그런 이유로 고려 때도 몽고가 침입했을 때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저항했으며, 병자호란 때도 임금이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으나, 청군의 진격이 너무 빨라서 미처 그리로 몽진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갇히는 탓에 정월의 모진 추위와 굶주림을 이겨내지 못하고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강화도는 한강을 비롯해서 임진강과 예성강이 휘돌아 흐르기 때문에 천연의 요새일 뿐만 아니라 땅도 비옥하여 모든 자원이 풍부하다. 게다가 강화도는 한반도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라 자원도 풍부하고, 서울의 서쪽에 있어서 지리상으로 보면 외래문명이 가장 빨리 들어올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연환경 덕에 강화도는 천연의 요새라 할 수 있으며, 그러한 말처럼 강화도 전체는 역사의 천연보존지역이라 할 만큼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유적들이 아주 잘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섬 주위의 갯벌을 비롯해 토지 자체가 비옥해서 모든 물산이 풍부하다. 또한 서해로 나가 중국으로 연결통로가 되기도 해서 한반도 중심의 교통의 요충지라 할 수 있다.

   현재 강화도는 두 개의 대교를 통해 육지와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두 개의 다리를 통해 강화도 서쪽의 교동도와 석모도로 자유로운 내왕이 가능하여 육지와 마찬가지로 편하게 여행다닐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을 한번 다녀오셔서 우리 선조들의 숨결을 느껴 보심이 어떨지 …….

    또한 석모도에는 고적하고도 아담한 수목원이 있어서 섬 속의 또 다른 경취를 느낄 수 있기에 꼭 한번 들러보실 것을 권한다.  


[참고] 정조대왕(1752~1800)은 47세에 붕어했으며, 1776년 왕위에 올라 23년간 개혁군주로 군림했다.     


[아래의 사진은 석모도 내부의 광경과 수목원의 휴양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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