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udolf Nov 12. 2024

질주, 질주, 질주. . .

- 영원을 향해 달리는 호랑이


온 대지가 눈부신 흰 눈으로 덮인, 혹 전설 속으로 들어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순백의 벌판. 한낮의 태양 빛을 받아 은빛 보석이 깔린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눈부신 백설의 세계. 그러한 순백의 벌판에서 대륙열차는 달려가고 있었다.

    게다가 뱀처럼 길고 긴 대륙열차 그 옆으로는 한 생명체, 거대한 생명체가 힘차게 뛰어가고 있었다. 대륙열차의 속도에 맞춰서. 태양 빛 직사로 내리꽂히는 환한 대낮인데도 시퍼런 안광을 내뿜으며 흰 눈 덮인 대지 위를 쿵쿵 울리다시피 하면서 질주하고 있는 호랑이. 짙은 갈색 몸통에 검은 줄무늬가 선명한 시베리아 호랑이가 힘차게 달려가는 대륙열차의 속도에 조금도 뒤지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내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호랑이는 다섯 종류가 있다.

    1) 그 유명한 시베리아 호랑이를 비롯해서

    2) 중국 남부에 서식하는 남중국호랑이

    3) 그리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 열대지방에 사는 벵골 호랑이

    4) 인도차이나 호랑이

    5) 수마트라 호랑이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다섯 종 가운데 오직 시베리아 호랑이만 한겨울에 시베리아 벌판의 흰 눈 속을 질주한다.

    한반도 북부에서부터 시작해서 만주벌판을 지나 연해주, 시베리아 광야를 지배하고 있는 초대형 육식동물인 위풍당당 시베리아 호랑이. 이 시베리아 호랑이는 열대지방 호랑이와 비교해서 최대 40~50퍼센트, 보통은 30퍼센트 이상 몸집이 크다. 한밤중에는 시퍼런 안광을 내뿜으면서 대지에 있는 모든 동물을 침묵시키며 유라시아 대륙 동쪽을 호령하는 대지의 지배자.



대륙열차는 흰 눈으로 뒤덮인 광활한 대지를 양옆으로 갈라놓으며 마치 영원을 향해 달리듯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서 거대한 호랑이가 흡사 최후의 경주를 하듯 힘차게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 광경을 대륙열차 안에서 내다보고 있는 한 사내가 있다. 시인. 그러나 아무도 그가 시인인 사실을 모른다. 아무에게도 자신이 시인이라고 알리지도 않았고, 실제로도 시 한 줄 쓰지 않은 시인. 하지만 그는 늘 자신이 시인이라고 자부한다. 그의 몸속에는 시가 들어 있으니까. 몸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 속까지도 시가 가득가득 들어 있기 때문에. 단지 그것을 내보이지 않고 있을 뿐이다.

    열차와 나란히 창밖의 백설 대지를 달리는 거대한 호랑이. 대낮인데도 마치 호랑이의 눈에서는 안광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한밤중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처럼 눈 부신 빛을 흰 눈 덮인 대지로 쏟아내면서 달려가는 육중한 생명체. 호랑이는 열차와 마치 경주를 하듯 힘차게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웅장한 미래로, 그리고 영원을 향해 돌진하듯.

    시인은 윗몸을 창 쪽으로 바짝 기울이며 호랑이를 바라보았다.

    대낮의 흰 눈 벌판을 달리는 집채만 한 호랑이.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마침 열차의 그 침대 칸에는 시인 말고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아 다른 사람들과 창밖의 놀라운 광경에 관해 대화는 물론이고 경탄도 나눌 수도 없었다.



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창에 코를 박듯 바짝 붙이고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다가 시인은 얼른 가방을 뒤져 노트를 찾아 꺼냈다. 그리고 엉성하긴 하지만 호랑이가 질주하며 따라오는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열차의 속도에 맞춰 따라오는 호랑이가 너무 빨라서 다리가 움직이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을 것 같았으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호랑이의 질주는 힘찼지만 바로 그 호랑이의 속도가 열차의 속도와 거의 같은 덕에 어딘지 호랑이의 모습이 슬로비디오를 보듯 몸과 다리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세세히 보이는 것이었다.

    게다가 열차 바퀴가 덜컹거리는 리듬과 호랑이가 뒷다리를 힘차게 뒤로 내뻗으며 질주하는 동작이 거의 일치하는 느낌도 들었다. 여기에 더해 호랑이가 뒷발로 내치는 눈보라가 겨울 벌판에 약한 무지개까지 피어오르게 하고 있었다

    마치 사슴에게 달려들듯 큼직한 발톱을 한껏 드러낸 채 발가락을 활짝 벌리고, 그 두툼한 발바닥과 성난 갈고리처럼 생긴 발톱과 발바닥으로 눈 덮인 평원에서 눈들을 힘차게 밀쳐내면서 눈보라를 일으키며 호랑이는 나아가고 있었다. 머리는 약간 앞으로 살짝 숙인 채, 어깨는 한껏 웅크렸다가 얼룩덜룩 줄무늬 진 몸뚱이를 앞으로 쭈욱 뻗으며 길쭉한 허리의 근육이 부르르 떨리면서 마치 꾹꾹 눌러놓은 용수철이 응어리진 한을 터뜨리며 한꺼번에 분출하듯 앞으로 튀어나가는 모습. 그와 동시에 마치 대포의 아가리에서 폭발해 나가는 포탄처럼 호랑이의 머리는 시베리아 얼음 공기를 쌩하게 가르며 힘차게 돌진하는 것이다. 게다가 눈에서는 시퍼런 광선이 마치 미래를 향해 쏟아져 나가듯 레이저처럼 뿜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호랑이의 네 발이 일으키는 눈보라가 안개처럼 번져가며 우람한 영물의 뒤로 뿜어져 나간다. 실상은 호랑이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그 모든 몸 동작이 세세히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그 질주가 마치 슬로비디오를 보듯 몸 동작 하나하나가 세밀화처럼 눈에 잡히는 것이었다.



백두산 호랑이라고도 하는 시베리아 호랑이. 동아시아 끝자락에 대양을 향해 뻗어 있는 한반도 북쪽에 서식하는 위엄 있는 영물인 호랑이. 영하 30도 밑으로 떨어지는 만주와 시베리아 벌판에서 북구의 시퍼런 하늘 아래의 새하얀 대지를 지배하는 호랑이.

    시인은 그 순간 한 줄 시 대신 그 영상을 머리에 담아 기억장치처럼 동일하게 복사해 놓는다. 이러한 순간에도 호랑이는 계속 질주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숙명처럼, 운명처럼, 본능처럼. 그리고 위임받은 권리처럼. 어쩌면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절대자의 명령처럼. [끝]  





작가의 이전글 가을 남자처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