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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 Nov 14. 2024

번외편: 박민우의 일기장



1994년 8월 3일

오늘은 첫 번째 실패를 겪은 날이다. 대학을 중퇴하고 시작한 PC방. 당시만 해도 전도유망한 사업이었다. 하지만 나는 모든 걸 완벽하게 준비하려 했고, 그러는 사이 주변에는 우후죽순으로 PC방이 생겨났다. 결국 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1996년 5월 20일

두 번째는 인터넷 쇼핑몰이었다. 완벽한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며 무리하게 대출을 받았다. 하지만 시장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빨리 변했고, 결국 빚더미에 앉고 말았다.


1999년 3월 11일

세 번째는 좀 더 신중했다고 생각했다.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 이번에야말로 성공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IMF가 터졌고, 거래처들이 하나둘 무너지면서 우리도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매번 실패할 때마다 주변에서는 포기하라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실패할 때마다 뭔가를 배우는 기분이었다. 완벽한 계획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것, 시장의 변화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까지.


1999년 6월 15일 

오늘도 실패했다. 세 번째 사업이 무너졌다. IMF 한파가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 내 통장에는 고작 3만원이 남았다. 어머니가 해주신 된장찌개가 이렇게 맛있었던가. 실패자의 밥이라 더 맛있는지도 모르겠다.


창업 교실에서 만난 후배가 물었다. "선배님은 왜 또 도전하실 건가요?" 

대답해주지 못했다. 나도 모르겠다. 그저 가슴 한켠이 답답해서, 뭔가를 증명하고 싶어서일까.


2001년 3월 20일

네 번째 시도다.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접근했다. 완벽한 계획 대신 시장의 목소리를 듣기로 했다. 작은 편의점으로 시작했다. 처음으로 고객의 얼굴을 직접 본다. 그들의 불만과 요구사항을 기록하고, 하나씩 개선했다.


놀라운 건, 실수할 때마다 손님들이 더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거다. "사장님,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처음으로 깨달았다. 완벽하지 않아서 오히려 관계가 쌓인다는 걸.


2001년 5월 15일

두 번째 점포를 열었다. 이번에도 완벽하진 않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발전할 수 있다는 걸. 첫 번째 점포에서의 실수와 경험이 두 번째 점포를 열 때 큰 자산이 되었다.


직원들에게도 늘 말한다. "실수해도 괜찮아. 대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 그러자 신기하게도 직원들이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실수를 숨기는 대신 공유하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전체적인 서비스 품질이 오히려 높아졌다.


2005년 12월 31일

드디어 해냈다. 한 편의점으로 시작한 체인이 이제 500호점을 열었다. 청와대에서 모범 자영업자상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가장 자랑스러운 건, 오늘 아침 본 20대 점주의 눈빛이다.


"박사장님처럼 되고 싶어요. 저도... 실패해도 괜찮은 거죠?"


그래, 실패해도 괜찮아.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그 눈빛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내가 이 긴 실패의 터널을 지나온 건, 어쩌면 오늘 이 청년을 만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는 걸.


2023년 3월 15일

오늘 특별한 청년을 만났다. 투자사 회의실에서 마주친 강서준. 그의 눈빛에서 나의 젊은 시절을 보았다. 완벽을 추구하는 집착,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불안과 열정까지.


이제 나는 안다. 진정한 성공이란, 누군가에게 '실패해도 괜찮아'라고 말해줄 수 있는 용기라는 걸. 서준이 내 마지막 도전이 될 것이다. 그의 완벽주의를 깨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해 또 다른 청년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것. 이것이 내가 그토록 많은 실패를 겪어야 했던 진짜 이유일지도 모른다.


이제 시작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우리는 함께 실패하고, 함께 성장할 것이다.


(번외편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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