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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Oct 27. 2024

무뚝뚝한 딸



나는 말수가 적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보통 밖에서 조용한 성격이면 집에 와서는 재잘거릴 법도 한데, 나는 집에서도 말이 없었다. 인생에 대단한 이슈가 있을수록 더 입을 다물었다. 취업 준비생이었을 때는 어떤 시험이든 말없이 다녀왔다가 좋은 소식이 있으면 그제야 얘길 꺼냈다.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부모님한테 미리 떠들수록 결과가 좋지 않다는 징크스 같은 것이었다. 돌이켜보니 징크스가 아니라 꼭 해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역효과를 냈던 것도 같지만. 그게 습관이 되어서 인지 나는 지금도 부모님에게 내 얘길 잘 안 하는 편이다. 나는 참 애교도 없고 무뚝뚝한 딸이다.


나보다도 더 한 놈이 바로 내 동생이다. 결혼식 날짜를 잡아놓고도 미리 얘길 안 해줘서 우리 가족만 상견례 자리에서 알았을 정도다. 오디오에도 질량 보존의 법칙 같은 게 있는 건지, 나랑 동생의 말수가 줄어들수록 엄마는 더 많이 떠들었다. 도통 자기 얘길 안 하는 자식새끼들 때문에 엄마는 틈만 나면 질문을 했다. 며칠 만에 겨우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으면 앞에 앉아서 "어디서 뭐 하고 왔냐" "네가 하는 프로그램은 언제 어디서 하냐" "점심엔 뭐 먹었냐" 등 지금이 아니면 대화를 못 한다는 심정으로 쌓아뒀던 말들을 다다다 쏟아낸다. 거기에 하나하나 대답을 하다 보면 꼭 한 번은 짜증이 질질 샌다. "아우 몰라~ 대충 먹었어!"


연예인이 아닌 사람들의 사연을 다루는 TV 프로그램 팀에서 일한 적이 있다. 수백 가지의 사연을 듣고, 수백 명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인터뷰를 하다 보면 꼭 한 번씩 오지랖을 부리게 되는 순간이 온다. 한 번은 어머니와 불화를 겪고 있는 자식과 인터뷰를 하면서 "어머님은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 텐데, 그 얘길 듣고 너무 속상하지 않았을까요?" 하고 되도않는 몇 마디를 얹었다. 그리고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온 나는 엄마의 질문에 또 짜증을 냈다. "엄마 나 너무 피곤해. 그만 좀 물어봐.“ 엄마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 텐데, 그 얘기를 듣고 너무 속상하지 않았을까? 정말이지 나한테나 했어야 하는 말이었다.


깨닫기만 하면 뭐 하나, 몸소 실천은 더 안 된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잘만 떠드는 다정한 말들이 가족들에게는 간지러워 뱉질 못하겠다. 엄마랑 아빠는 알까? 엊그제 아빠가 구워준 삼겹살을 받아 들고 퉁명스럽게 뱉은 "땡큐" 한 마디가, 거울을 보며 다 늙었다고 속상해하는 엄마에게 짜증 내듯 "아우 예뻐!"라고 던진 한 마디가 나름 노력해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웃는 얼굴로 고맙다, 사랑한다고 다정하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 또 연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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