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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얀 Apr 16. 2024

너가 좋아하고 잘하는 게 뭐니?

Part II. Mission에서 Identity 까지

세종시에서 숨터라는 대안 교육을 고민하던 때의 일이다. 숨터라는 공간에 처음 방문한 친구와 첫날 이런 저런 놀이를 하며 함께 어울려 놀았다. 그리고 그 날 마지막 시간에 반려견과 함께 산책 면담을 진행했다. 처음 숨터를 방문하는 친구와 갖는 라포 형성 프로그램이었다.


https://cafe.naver.com/soomteracademy

지금 이 공간은 아카이빙된 상태다. 언젠가 교육 사업을 다시 전개할 기회가 오리라 생각하며 이때의 경험들을 보관해두고 있다.


“가은이(가명임)는 제일 좋아하고 제일 잘하는 게 뭐니?” 아이가 아이 스스로의 강점을 잘 인식하고 있고, 어떤 분야에 흥미를 느끼는지를 알아보고 싶어 건넨 말이었다. 아이는 한동안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더니 뜻밖에도 눈물을 글썽였다. 대부분 이 대목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게임이나 즐겨하는 놀이를 말했기에 가은이도 그렇게 대답하겠다 싶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눈물이라니... 아이를 잠깐 다독인 다음 찬찬히 이야기를 들어봤다.


가은이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외견상 전혀 문제 없어 보이는 가정이었다. 가은이가 부모와 함께 있을 때면 약간의 부조화스러운 면이 있긴 했지만 크게 두드러지진 않았다. 가은이는 11년 삶 동안 엄마가 좋아하고, 엄마한테 칭찬 받는 것들에만 집중해왔다. 가은이는 그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느끼고 살아왔다.

그런 가은이에게 갑자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생긴 거다. 사실 저 질문을 던지기 전 아이와 주고받던 대화 중에 가은이는 본인이 좋아하는 게 아닌 이걸 하면 엄마가 좋아한다는 얘길 반복적으로 했었다. 그래서 난 다시 물었었다.


“아니, 그거 말고 가은이가 좋아하는 거, 그건 엄마가 좋아하는 거쟎아.”


부모의 취향이 아이에게 이어지는 게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손흥민, 김연아등 청소년기부터 이미 두각을 나타내어 이젠 영웅의 경지에 오른 이들은 모두 어린 시절에 일찌감치 스스로 Mission을 깨달았던 이들이다. 이들의 Mission은 부모로부터 주어졌다. 이들 부모들은 일찌감치 아이의 재능을 발견하고 이 재능을 키우고 꽃 피워내는 것을 스스로의 Mission으로 여기고 혼신(渾身)을 다해 아이에게 투신했다.  아이는 자신에게 오롯이 투신하는 부모의 Mission으로부터 비롯된 Mission을 잘 받아들여 기꺼이 본인의 Mission으로 삼았다.


때로는 나보다 내 몸 상태를 더 잘 아는 부모라면 아이가 전적으로 신뢰할 수 밖에 없다. 흔히들 부모가 아이의 삶에 간섭하거나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고 하는데 욕심은 내가 투자한 것은 50인데 100의 결과를 바라는 것이다. 아이와 실제로 공유하는 시간은 많지 않으면서 내 맘대로 하려는게 욕심이다.


가은이 엄마는 육아와 분리된 자신만의 삶이 분명히 있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엄마 삶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그 일부의 시간에 충분히 만족하지 못한 가은이는 늘 엄마 바라기가 됐고, 엄마의 애정을 갈구하며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을 살피고, 그것들을 잘해내가며 칭찬 받는 것으로 부족한 애정을 성취해가는 삶을 살아왔다. 이렇게 자라나는 아이들은 늘 누군가의 눈치를 보게되고 타인의 기준에 맞춰 사는 추종자의 삶을 살게 된다.


아이의 자아가 충분히 성장했고 적어도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윤리적 토대가 마련됐다면 그땐 선택권을 쥐어줘도 좋지만 그 전에는 적극적으로 부모가 아이의 교육에 개입해줘야 한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큰 다음엔 스스로 알아서 하고 싶은 것 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겠지하고 내버려두는 건 양육 책임에 관한 자기합리화다. 부부가 서로의 DNA에 관해 논의하고, 아이의 행동과 재능을 유심히 관찰하고, 아이에게 일찌감치 다양한 체험을 경험케하고, 몰입의 즐거움을 장려해가며 교육해가나는 건 한 사람의 Identity를 체계적으로 수립해가는데 단단한 밑바탕이 되어준다. 오펜하이머의 사례를 보자.


오펜하이머의 아버지는 아이가 '돌'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아이와 함께 '돌'에 관해 이야기하고 아이가 '돌' 연구를 지속해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해줬다. 오펜하이머는 어린 나이에 뉴욕의 지질학자들과 '돌'을 주제로 서신을 주고 받다 상대방이 어린 아이인지 몰랐던 학자들에 의해 뉴욕광물학회 클럽 회원으로 추천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클럽으로부터 강의 초청을 받기에 이르른다. 아버지는 부담스러워하는 아들을 격려해 실제로 연단에 서서 강의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훗날 오펜하이머가 지질 학자가 된건 아니지만 이 무렵 아버지와 함께 쌓은 추억은 훗날 본인의 Identity를 정립하고, Mission을 찾아 온전히 투신하기까지 단단한 뒷배가 되어줬다. 그는 이 무렵의 아버지에 관해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가장 관대하고 인간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고는 그것을 해주었다. " (Ref. 오펜하이머 39p, 사이언스북스)


부모 욕심대로 아이를 키우면 안된다면서 아이들에게 많은 선택권을 주면서 키우는 가정도 많이 봐왔었다. 이렇게 아이가 삶의 주도권을 온전히 틀어쥐게 되면서 온 가정이 난리가 났다. 마치 거대한 배의 조타기를 조그만 아이에게 쥐어준 것과 같았다. 아이는 타를 우로 돌렸다. 좌로 돌렸다. 이 버튼 저 버튼 눌렀다 했고, 온 집안이 아이의 선택 하나에 휘청 휘청거렸다.


워낙 귀한 손(孫)인 건 익히 알았으나 아이를 둘러싼 어린 왕과 신하들과 같은 풍경에 한숨을 내쉰 적이 많았다. 이렇게 늘 많은 선택지를 제안 받으면서 성장한 아이들은 나중에 선택 장애에 빠지게 된다. 몰라서 선택을 못하는 게 아니라 늘 더 나은 게 제시되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선택을 계속해서 뒤로 미뤘다. 습관적 우유부단함은 삶의 자생적 추진력을 잃게 한다.


MZ 인턴들을 만나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인턴 기간이 끝나고 비로소 본격적인 부서 배치를 할 때가 되면 대부분은 “아직 자신의 적성을 찾지 못했다”고 하거나 또는 “스스로 뭘 잘하는 지 알기 어려워 선뜻 선택을 하기 어렵다”는 말을 했다. 10명중에 9명은 그랬다.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의 첫발을 떼야 하는 20대 중반인데 아직도 스스로 뭘 잘하고 좋아하는 지를 모르겠다는 거다. 탐색의 시간을 갖겠다는 선택은 십분 존중하지만 그렇게 탐색의 시간을 보낸 뒤에도 정말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러웠다.


아무리 멋지고 아름답고 튼튼한 배도 목적지가 없으면 표류할 수밖에 없다. 항행에 아무 문제가 없다해도 목적지가 없는 항해는 표류다. 삶의 1년, 1년은 생의 모든 분야의 선택지를 물리적으로 소거한다. 늘 내가 선택지를 많이 갖게 될 꺼라 착각하면 안 된다. 언제나 탄탄한 나의 뒷배가 되어줬던 부모의 시간도 영원하진 않다. 최소한 목표가 있다면 모든 결정과 판단은 목표에 입각해 이해될 수 있지만 목표 조차 없다면 어떤 결정이나 판단도 무의미해진다.


이 아이들은 모두 공교육 테두리 안에서 Job Fair나 직업찾기 프로그램등을 통해 아이들의 진로를 탐색하는 시간도 가졌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한 사람의 생을 결정짓는 Mission에 대한 고민이 진로 탐색, 진로 찾기로 격하되고 단순화되어 아이들에게 객관식 문항으로 제시될 즈음이면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거다.


아이가 Identity를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부모의 교육적 개입은 아이를 잉태한 순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게 바로 부모의 Mission이다. 싫든 좋든 자녀를 낳는다는 건 나로부터 비롯되어진 존재가 스스로의 Identity를 확립하고 올바른 Mission을 찾아 살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교육자의 Mission을 부여 받는 것을 의미한다.




★ 본 원고는 세 번째 출간 예정작인 <Mission, 카이로스의 시간>의 초고입니다. <Mission, 카이로스의 시간><백년병원> 챕터 1의 심화 버전으로 기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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