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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 May 24. 2021

소설가는 어떻게 소설을 쓰는가 #2

2. 하나의 의문은 소설의 영감이 된다

소설가는 어떻게 소설을 쓰는가, 그 두 번째 이야기


- 소설의 영감을 얻는 과정과 그것의 집필 과정, 여덟 편의 소설을 통해 살펴보다


6월 출간하는 소설집, <<페르소나를 위하여>>



나의 소설집 <<페르소나를 위하여>>에는 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있다. 그 두 번째 소설은 소설집의 대표작이자 제목이기도 한 <페르소나를 위하여>이다. 이 소설을 집필하게 된 건 현대 사회에 대두되고 있는 인간의 자의식에 문제를 생각하게 되면서부터였다. 나는 SNS의 시대 속에 살고 있는, 시대의 존재이다. 어려서부터 SNS를 하며 살아왔다. 그 계보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다모임부터 세이클럽, 버디버디, 싸이월드, 페이스북, 그리고 인스타그램까지. 돌이켜보면 중학교 시절 이후부터 SNS를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의 삶은 SNS와 함께 한 셈이었다. 지난 몇 년간 SNS와 함께했던 삶에 대해 생각을 해보곤 했다.


SNS는 이제 현대 사회의 긴밀한 연결망이 되었다. 이제 그 누구도 온라인 상에서 나눈 대화를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휘발성이 짙은 현실 속 대화보다 SNS에서 나눈 대화는 그 기록이 남기에 그 효력이 강하다. 가령 구두로 주고받은 말들은 그 효력이 미비한 반면, SNS 상에서 텍스트로 나눈 대화는 법적으로도 그 효력이 있다. 기록의 힘을 아는 우리는 이제 SNS에서 더 이상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물론 익명성 뒤에 숨을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완전한 익명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SNS에서 홧김에 말실수를 했다가는 현실에서의 내가 고소장을 받을 수도 있다. 


때문에 SNS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의 계정은, 이제 우리의 자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SNS 속 자아는 현실의 자아와는 다른 점이 있다. 바로 가소성이다. 우리 자신이 SNS 속의 정체성을 새롭게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활동명을 정하고, 프로필 사진을 올리면 이것이 SNS 속에서 그 자신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된다. 또한 올리는 사진과 영상, 그리고 글들은 그 자신의 세밀한 정체성을 대변한다. 이렇게 카카오톡 프로필부터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틱톡, 유튜브 등에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들을 정제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이러한 사회 현상을 끊임없이 스스로를 전시하는 '전시 사회'라 진단했다. ('전시 사회' 에세이 : https://brunch.co.kr/@leewoosview/362)


'전시 사회'에서 한 개인의 정체성은 사회가 부여하지 않는다. 가령 이십 년 전만 해도 한 개인을 나타내는 건 귀속감이었다. 어느 지역 출신이고, 어느 학교를 졸업했고, 또 어떤 일을 하는지가 그 사람을 대변했다. 곧 그 사람의 명함 한 장이 그의 자아로 통칭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SNS의 등장은 그 패러다임을 바꿨다. 이제 명함 한 장보다 한 개인의 SNS 계정이 그를 더 잘 정의하고 있다. 우리의 자아에 있어 사회적 귀속감은 더 이상 효력이 없다. SNS에서 우리는 '어느 곳의 인간'으로 정의되려 하지 않고, 스스로 '어떤 인간'임을 드러낸다. 나아가 자신이 세상에 드러내고 싶은 모습만을 정재해 SNS 속에 쌓아간다. 


이처럼 SNS는 자신이 의도한 대로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다. 자신이 세상에 드러내고 싶은 모습만을 정제해서 드러내는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굉장히 전문적이며, 무척이나 아름답고, 또 유머러스하며, 감성적이기도, 이성적이기도 하다. 이 시대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정제된 모습을 확장시켜나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인플루언서'라 부른다. 이렇게 SNS 속 우리들의 자아는 우리 자신을 대변하는 프로필이자 이력서가 된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스스로가 정제한 '가공의 자아'는 우리 '본연의 자아'와 얼마나 일치하는가? 과연 SNS가 우리를 온전히 대변할 수 있을까.


원하는 모습만 가공해서 드러내는 SNS 속에서 우리는 완벽하고, 아름답고, 행복하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인스타그램에는 불행이 없다' 하지만 SNS 속 자신에 대한 자의식이 커질수록 현실과의 이질감과 간극은 점점 커져간다. 도대체 어떤 모습이 나 자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단편소설 <페르소나를 위하여>는 이러한 현대인의 자의식에 대한 문제를 담았다. 소설은 의문을 던진다. 과연 '가공의 자아'와 '본연의 자아'는 어느 정도 일치하며 어느 정도 간극이 있는지. 만일 '가공의 자아'와 '본연의 자아' 중에서 하나의 자아를 선택하게 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자아를 진짜 자신의 모습이라고 여길지.


이렇게 소설가는 자신이 직면한 사회 속 발현되고 있는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의문을 계속해서 곱씹는다. 문제에 대해 섣불리 답하지 않고 아주 오랫동안 되새김질하며 음미한다. 이제 이 의문은 하나의 가정으로 자라난다. 만일 이러한 문제를 절실한 실존의 문제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소설가는 이 가정으로부터 서사를 구축해 나간다. 한 문장으로 정의될 수 있는 문장은 이제 정교한 알레고리로 이루어진 서사 속에 감춰져 있다. 이렇게 소설가는 때로 하나의 의문으로부터 소설을 집필한다. 정교한 서사를 뒤집어쓴 의문은 이제 세상과 마주한다. 누군가 자신의 본질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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