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용 질소 호흡기

by 이진영

커피 냄새가 훅 끼쳐 와 숨을 참았다. 커피에서는 너의 맛이 났다. 묵직하고 다정한 맛. 그렇게 너를 맛본 날이면 잠들지 못했다. 너는 다정한 어른이었다. 이제 막 어른이 된 내게 든든한 버팀목이 돼 줬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너는 희게 웃었다. 그 웃음을 사랑했다. 나도 모르게 사랑해 버렸다. 감은 눈 너머로 네가 아른거렸다. 네 얼굴을 선명하게 보고 싶어져 가만히 눈을 떴다. 달라진 건 없었다. 하얀 형광등 불빛을 바라보며 여름을 생각했다. 금빛으로 빙빙 돌던 한낮의 태양이 눈앞에 겹쳐 보였다.


내 어린 시절은 좁고 어두웠다. 어머니의 눈물과 아버지의 고함이 할퀴고 간 자리. 그곳에서 나는 홀로 자랐다. 그런 내게 너는 구원자였다. 너를 만나고 처음으로 삶이 차오른 느낌을 받았다. 그래, 너는 가족이자 연인이자 친구였다. 나의 모든 것이었다. 어느 겨울 우리는 바다에 갔다. 겨울 치고는 포근했지만 바닷바람이 거센 날이었다. 너는 빨개진 코를 훌쩍이며 씩 웃었다. 나는 그런 네게 모자를 푹 씌워줬다. 그날의 나는 모든 것에 신이 났다. 독수리만큼 큰 갈매기, 쉴 새 없이 요동치는 파도, 내가 넘어질까 걱정돼 꼭 잡아주는 너. 네 곁에서라면 맑게 웃을 수 있었다.


가끔 발을 헛디뎌 우울에 빠질 때도 있었다. 바람이 차던 초봄의 새벽, 그날 나는 많이도 울었다. 눈물의 끝에 네가 생각났다. 횡설수설 문자를 보내고는 까무룩 잠들었다. 하루가 다 돼서 답장이 왔다. 조심스레 위로를 건네는 말투에 웃음이 번졌다. 그날 네 다정은 평소보다 배는 달았다. 사랑도 끓이면 농도가 짙어지는 거였다. 우리는 대개 잘 맞았고 가끔 엇갈렸다. 그럴 때마다 차를 끓였다. 망 끄트머리에 달린 실을 만지작거렸다. 실을 움직일 때마다 찻망이 맥없이 색을 번져냈다. 우리 같은 처지구나, 생각하며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실 대신 네게 매어 살았다. 아니, 스스로 나와 너를 매듭지었다.


기울어진 관계에서, 결국 나는 미끄러졌다. 우리의 마지막은 남들과 같았다. 너의 다갈색 눈동자가 보내는 시선을 담담히 받아냈다. 순간 물기가 어렸다.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 멍한 눈에 쨍한 빛이 담겼다. 태양이 빙글빙글 돌며 따라왔다. 너의 실에 매달려 있다는 건 내 착각이었나 보다. 인연의 실은 진작 끊겨 있었다. 실이 바닥에 끌릴 때가 돼서야 알았다. 서러움은 전할 수도 삭일 수도 없었다. 그저 숨을 참고 감정이 가라앉기를 빌었다.


사랑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사람에게 선택지는 없다. 오늘도 지난 기억으로 숨을 쉰다. 오늘도 나는 산소 대신 질소를 들이마신다. 질소를 머금은 몸은 무겁고, 무겁고, 또 무거워져서 결국엔 가라앉을 것이다.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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