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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은 May 05. 2020

식사와 디저트 사이, 카야토스트

다섯 번째 요리

마음에 돌덩이라도 달린 듯 끝 모를 바닥으로 침잠하는 날이 있습니다. 뉴스를 봐도 좋은 소식이 없고, 휴일에도 기다려지는 이벤트가 없으며, 보고 싶은 사람들과도 만날 수 없는 요즘. 스스로를 위로할 방법이라고는 맛있는 음식밖에 더 있을까요?


이탈리아인이 사랑하는 디저트 ‘티라미수’는 현지어로 ‘나를 끌어올리다,’ 즉 ‘기분을 좋게 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정말이지 달콤한 음식에는 행복감을 선사하는 마법 같은 능력이 있으니까요.


평소에 케이크와 초콜릿, 사탕을 즐기지 않는 저도 오늘처럼 기분이 가라앉는 날에는 달달한 무언가를 찾게 됩니다. 마음 같아서는 티라미수나 치즈케이크, 마카롱과 같은 멋스러운 디저트를 내놓고 싶지만, 재료비를 아끼기 위해 조금 더 간편한 선택지에 기대기로 합니다. 바로 카야토스트입니다.


출처: https://killiney-kopitiam.com/pages/about-us

카야토스트는 싱가포르인의 아침 식사로 널리 사랑받는 음식이지만, 제 입맛에는 디저트에 가깝습니다. 우선 카야토스트의 핵심인 카야잼이 무척 달콤하거든요. 코코넛 밀크를 주재료로 하는 카야잼은 달기도 달지만, 진하고 고소하기까지 합니다. 바삭하게 구운 토스트에 옅은 갈색빛이 도는 카야잼을 바르고, 버터를 두툼하게 썰어 넣으면 카야토스트 만들기는 끝입니다. 현지인처럼 즐기려면, 수란에 간장과 소금, 후추를 톡톡 뿌려 소스처럼 곁들여 먹으면 되지요.


카야토스트는 영국 선박의 부엌에서 일하던 중국 하이난 지방 사람들이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 정착하며 탄생시킨 요리라고 합니다. 영국 잼이 아닌, 현지 사람들이 즐겨 먹는 코코넛 밀크 스프레드를 사용한 것이 신의 한 수였습니다. 선견지명을 가졌던 하이난인들은 1944년에 야쿤 카야 토스트(Ya Kun Kaya Toast)를, 또 1919년에는 지금은 킬리니 코피티암(Killiney Kopitiam)이라고 불리는 켕호헝 커피숍(Kheng Hoe Heng Coffeeshop)을 설립했고, 2000년 이후 사업이 급속도로 팽창하면서 카야토스트가 ‘국민 아침’으로 자리 잡았다네요. 아마 최근 수년간 싱가포르 여행을 다녀온 분들이 계시다면, 한 번쯤은 카야토스트를 드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굳이 싱가포르까지 가지 않아도, 코코넛 밀크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집에서 카야토스트를 즐길 수 있습니다. 식빵과 버터, 달걀, 그리고 설탕 정도는 부엌에 있기 마련이고, 혹시 떨어졌다고 한들 집 앞 편의점에서도 구할 수 있으니까요. 문제는 코코넛 밀크인데, 다행히 저는 집 근처 드럭스토어에서 발견할 수 있었답니다.


카야잼을 만드는 법은 무척 간단합니다. 코코넛 밀크와 날달걀, 설탕을 섞어서 중탕하면 끝이니까요. 하지만 약 1시간 동안 천천히 저어가며 굳혀야 하기에, 코로나 19로 유명해진 화제의 음료 ‘달고나 커피’ 못지않은 인내심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무료함을 달래기에 최적인 셈 아닐까요?


실제로 저는 부엌에서 달달한 향을 맡으며, 묽은 갈색 액체가 점점 굳어가는 과정을 보는 일이 꽤 즐거웠습니다. 걱정할 일이 차고 넘치는 요즘,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머리를 비우다 보니 이상하게 마음도 편해지더군요. 그리고 노동, 혹은 수련의 보상으로 달콤한 카야토스트까지 먹을 수 있으니,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제 끈기가 부족했는지 완성된 카야잼은 조금 묽었고, 남편에게 부탁한 수란은 삶은 달걀이 되어 돌아왔지만 만족스러운 식사, 혹은 간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사는 곳에서는 코로나19 사태가 쉬이 잠잠해질 것 같지 않으니, 카야토스트의 효과가 떨어지기 전에 또 새로운 ‘코로나 블루’ 치료제를 찾아봐야겠습니다.


재료(2인분 기준): 코코넛 밀크 400ml, 달걀 4개, 설탕 330g, 식빵과 버터(먹고 싶은 만큼)

1. 가열 가능한 용기에 푼 달걀과 설탕과 코코넛 밀크를 순서대로 넣어 잘 섞는다.

2. 냄비에 물을 붓고 끓기 직전에 끈 다음 1을 약불에 1시간 중탕한다. 이때, 달걀이 굳지 않도록 쉬지 않고 천천히 저어준다.

3. 카야잼이 완성되면, 식빵 테두리를 잘라내고 토스트기 혹은 프라이팬에 바삭하게 굽는다.

4. 식빵 한쪽에 버터를 썰어 올리고 다른 한쪽에는 카야잼을 고르게 발라 덮는다.

5. 여기에 온천 달걀(약 70도의 물에 20분쯤 담그면 된다) 2개를 달걀을 풀어, 간장과 소금, 후추를 살짝 뿌린 뒤 함께 먹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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