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의 경험이 많지 않았다. 해발 고도에 따라 날씨가 다를 거라고는 고려해보지 못했다. 그저 운동해서 열이 나면 한 겹씩 벗으면 된다고만 생각했을 뿐.
MBTI가 ENTJ인데, J형의 사람으로서 나는 만반의 준비를 다했었다. 소화제, 해열제, 가글, 손 소독 물티슈, 비옷, 등산스틱, 경량 패딩, 물 1.5리터와 따뜻한 물 등등.
준비해놓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너무 과한가 싶어 경량 패딩을 숙소에 두고 갔었는데 그게 신의 한 수가 될 줄 몰랐다. 나는 나를 좀 더 믿었어야 했다.
해발 1800m 일 때, 진짜 구름 바람(?) 안개 바람(?) 비바람(?) 같은 뭔가 모를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바람 때문인지 해발고도 때문인지 숨이 턱턱 막혔다. 바람은 올라갈수록 휘청 일정도였고 그 바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갈 때는 갑자기 쫄딱 젖은 생쥐처럼 물이 뚝뚝 흘렀다.
올라가면서 사람들이 머리가 진짜 방금 머리 감은 것처럼 쫄딱 젖어 내려오길래 '땀이 많은가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정상을 올라가서야 알았다. 저게 다 비바람 때문이었다는 걸.
1800m에서 '얼마 안 남았네'라고 생각했는데
옆에 지나가는 사람이 '이제 시작'이라고 말하며 지나갔던 것처럼. 정말 그때부터 본무대 시작이었다. 경사가 장난 아닌데 큰 돌들을 밟고 지나가야 했고 비바람 때문에 미끄러울까 봐 걱정되었다. 올라갈수록 나무는 낮아졌고 등산로 옆은 절벽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밧줄 하나에 의지해 돌을 밟고 올라가야 했고, 심지어 중간에 밧줄이 끊겨있기도 했다. 되돌아 내려올 때 무서워서 울 뻔했다.
그리고 정상에 올랐을 땐 정상에 있는 비석과 사진을 찍기 위해 1시간 넘게 줄을 서야 했는데 이때 진짜 시베리아 온 줄 알았다.
손이 꽁꽁 얼어서 감각이 없었고, 완벽한 겨울이었다. 비바람마저 완벽했다. 백록담이 보이지 않았으니.
성판악이 그나마 완만한 코스였지만 풍경은 지루한 편이라서 성판악 -> 관음사 코스로 내려가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날씨가 안 좋은 탓에 다시 되돌아 내려왔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내려갈수록 날씨는 좋아졌다. 정상에만 구름이 걸려있어 안 좋았던 것이다.
등산은 등산보다, 하산이 본질이었다.
걷고 또 걷고, 또 걸어도 계속 걸어야 했다.
중간도 못 내려왔을 때 잠시 샛길로 있던 '사라오름'
사람들은 다 지나쳐서 내려가던데, 나는 저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마음은 가보고 싶은데 내 체력을 내가 잘 모르겠어서. 시계를 한참 보다가 언제 또 와보나 싶어서 샛길로 들어섰다.
왕복 40분 거리였지만, 한라산 총 등산 시간이 12시간이었기에 용기를 냈어야 했다. 계단을 올라갈수록 안 가봤으면 진짜 몰랐을 아름다움을 만나게 되었다. 물이 다 말라있었지만 청량한 하늘에 뻥 뚫린 뷰에 싱그러운 초록빛.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하산만 걱정이 안 된다면 여유롭게 몇 시간 누워있고 싶은 곳. 사람들이 잘 안 오는 탓에 조용하고 더 힐링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하산하는 길은 내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니었다. 신들린 축지법을 쓰며 돌로 된 길을 내려가기도 하고 좀 걷다 쉬 고를 반복하기도 했다. 마지막이 얼마 안 남았을 때는 걷는데 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