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aka Sep 05. 2024

나의 직장人生 (4)

- 인지 부조화인 상사를 만났을 때 -


# 속아 넘어가기 좋은 인상

모든 과장들 위에 있으며, 내가 속한 사내 조직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Y.

그의 인상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KFC 할아버지다. 그의 대외 이미지는 온화하고 인자하다. 나는 그동안 그 이미지에 깜빡 속아 리더의 무능함과 조직의 문제점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차라리 막말을 쏟아내고 괴팍하게 권위를 부렸다면 더 빨리 눈치챘을 거다. 친절하고 부드럽게 구는 모습과 바른 말을 구사하는 모습 때문에라도 그가 주문한 비합리적인 일을 신뢰하고 수행했다. 분명 내가 모르는 상황과 이유가 있겠지 하며 선뜻 이해심을 발휘했다. 하지만 한 번 크게 번아웃이 오고 나서 상황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Y의 인상과 말투에 근거하지 않고 그의 행동을 근거로 상황이나 문제를 파악하기 시작한 거다.


# 성품과 리더십

Y는 기본적으로 성품이 좋은 사람이다. 상대를 얕잡아 보거나 남을 험담하지 않으며, 아래 사람의 공을 가로채거나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다. 일에 있어서는 신중하고 성실하다. 그럼 뭐가 문제란 말일까?


사람은 좋은데…


한 개인으로선 별 문제될 게 없는 품행이 단정한 사람이다. 하지만 한 조직의 리더 위에 올려 놓고 볼 때는 좋은 사람만으론 안 된다. 내가 옆에서 파악한 Y는 위험 회피성이 강하고 도전보다 안정을 추구하는 유형이다. 새로움을 낯설어 하고 경험한 것을 더 신뢰한다. Y보다 위에 있는 상부의 지시엔 ‘아니오’를 못 해보고 ‘네’로만 살아왔다. 상부의 지시라도 현 상황에 비추어 비합리적인 일이라면 문제 제기를 통해 조정하거나 개선해 나가는 게 상식 아닌가. 타당한 문제 제기는 상부의 뜻에 반하거나 저항하려는 게 아니라 조직이 합리적인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가도록 유도하는 행위다. 하지만 Y는 상명하복이 박혀 있는지 간부 회의에서 상부 조직이 원하는 뜻을 밝히면 그에 따라 즉각 우리 하부 조직의 업무 방향을 틀어 버린다.


물론 상부 조직에서 내려온 프로젝트의 방향성과 메시지는 보편 윤리적이고 대의적이다. 지금 내가 제기하는 문제의 초점은 업무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업무 체계의 문제점을 가리키는 거다. 하나의 프로젝트는 여러 파트가 의논하고 조율하며 합을 맞춰가는 업무 흐름을 갖기 마련인데, 상부 조직의 일을 받지 말라는 게 아니라, 일의 순서를 지켜 달라는 말이다.


프로젝트 내용은 공익적인데
프로젝트를 만드는 과정은 공익적이지 않아


함께 잘 사는 세상 만들어 보자고, 모두 이롭자고 공익적인 주제의 프로젝트를 잡아 놓고 제작 과정은 모두를 이롭게 하지 못하는 아이러니. 내가 너무 순수한 건가? 세상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공명정대한 조직이 어디 있다고, 너무 무리한 걸 요구하나? 그냥 할 만큼 하고 월급 받으면 됐지, 혼자 고고한 척 하나?


혼자 잘난 척이라고 욕 먹어도 좋다. 겉으론 민주적인 듯 보이나 거의 단일 의사 결정으로 몰아가는 이중적 조직 행태보다야 낫다. 내가 분이 나는 좀 더 근본적 이유는 비합리적 업무 체계 때문에 점점 하락세를 타고 있는 내 열정과 의욕이 아까워서다. Y가 실무자들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면 좋으련만. 앞을 더 내다보고 눈앞의 일을 판단하면 얼마나 좋으려나.


Y보다 위에 있는 상부 조직은 하부 조직의 상황을 Y보다 잘 모를 거다. 중간자 입장인 Y의 처신이 더 중요한 이유다. 상부 조직의 지시에 비합리적인 부분이 있다면 Y는 업무 조정을 요구하거나 합리적인 방향을 제시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그저 상부 조직의 지시를 따라 하부 조직에 탱크처럼 밀어붙인다.


각 과에서 진행중인 프로젝트들이 갑자기 중단되거나 뒤로 밀리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회사의 급한 사정으로 한두 번은 그럴 수 있다 치자. 이젠 만성이 되었다. 더 효율적으로 체계적으로 일할 수 있음에도 이러한 관행 때문에 일의 순서와 조직도가 꼬여 버렸다. 조직원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조직을 무능하게 만들었다.   


크게 보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큰 조직을 개인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듯한 관행에 직급자들의 위치는 애매해졌다. 리더는 직급자들에게 직급에 맞는 권한을 주고 일에 책임을 지게 해야 조직 체계가 탄탄해진다. 그런데 Y가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실무 영역을 침범하니 팀장이나 과장은 자신의 권한이 어디까지이고 무엇을 책임져야 되는 것인지 역할이 불분명해진 거다.


실무는 실무자들이 잘 해 나가도록 관리하는 게 리더의 역할이다. 그런데 관리자가 실무 영역을 제멋대로 침범하니 실무자들의 역량은 키워지지 않는다. 실무자가 잘 크지 않으니 자기가 또 개입해서 해결한다. 악순환이다. 실무자 육성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이 관리자를 대체 어찌하란  말인가.


연차 따로, 실력 따로인데 어쩌겠어요?


물론 Y는 이렇게 변명할 수도 있다. 늘어나는 연차만큼 실력도 비례하면 좋은데,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지 않느냐, 연차는 얼마 안 돼도 실력이 좋아 일을 직접 맡기게 되었다라고.  그럼 그 실력자에게 알맞은 직급과 권한을 보장해 줘야 되지 않는가? 다른 과장들이나 팀장들이 형평성에 맞지 않다고 항의할까 봐 그러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그 실력자 입장에선 형평성에 맞는 일인가? 자기 필요한 일에는 써먹고 형평성 운운하며 조직의 안녕을 추구한 Y의 행정 편의주의적 발상의 피해자, 바로 10년 만에야 팀장을 단 내 얘기다.



# 인지 부조화인 상사

성품은 좋은데 리더십이 별로인 Y를 보면 아이들이 싸우든 말든, 집안 꼴이 어떻게 돌아가든 난 열심히 일해서 돈만 잘 벌어오면 된다는 집안의 가장을 보는 것 같다. 업무 조정 능력도 떨어지지만, 조직 구원성원들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에도 미온적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D과장이 아래 직원에게 네가 뭘 아냐며 멱살을 잡고 폭언을 퍼부은 사건, M과장이 자신의 말을 안 들으면 짤릴 줄 알라며 아래 직원을 겁박한 사건, 또 M과장이 아래 직원들의 성과를 가로채 자신의 이름을 맨 위에 올린 사건 등 문제가 터질 때마다 아래 직원들이 Y에게 문제 제기를 했지만, Y는 약자를 보호하지 않았다. 과장과 대화는 해보았느냐, 아마 과장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을 거라고 대응하는 상급자를 보며 누가 조직을 신뢰하고 존중하겠는가. 결국 여러 직원들이 부서 이동을 하거나 퇴사했다. 모두 정신적 번아웃이 와서 희망이 없어 떠난 거다.


인간과 DNA가 98%나 일치하는 침팬지의 세계에서도 침팬지의 우두머리는 밑의 서열끼리 다툼이 날 경우 대부분 약자 편에서 문제를 해결한다. 책 ‘침팬지 폴리틱스’에서는 이를 ‘보안관 행동’이라 설명하고 있는데, 시대와 문명을 초월해 최고 권력자는 약자의 편에 서서 문제에 임할 때 정치적 안전성이 오래 유지되었다. 침팬지 사회가 인간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면 지금 우리 조직은 위기라는 걸 보여주는 거다. Y가 약자가 아닌, 독재자에 가까운 M과장의 편에서 문제에 임하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입으로는 형평성과 공정을 내뱉는데 행동을 보면 일관되지 않는 Y. 그는 자기의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걸 잘 인지하고 있을까? 내 관찰에 의하면 문제 인식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자기 세계 안에선 자기의 말과 행동이 일관되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인지 부조화 상태다.


[인지 부조화]
사람들이 자신의 태도와 행동 등이 서로 모순되어 양립될 수 없다고 느끼는 불균형 상태가 되었을 때,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자신의 인지를 변화시켜 조화 상태를 유지하려 하는 것.


하나의 일화를 소개하면 Y가 어느 과장 밑의 직원에게 과장도 모르게 일을 지시한 적이 있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여러 과장이 같은 사안에 대해 수차례 지적을 했지만 Y는 그때마다 나름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자신은 질서 체계를 어지럽힌 게 아니라 사정이 있었다는 거다. 한두 번은 실수지만 계속 반복되면 실력이라고 했던가. 누군가는 그 사람의 인품이라고도 했다. 실수가 아니라 그렇게 자리잡은 의식대로 행동하는 걸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태다. 자기가 자신을 바라볼 때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해지니까 양심이 거리끼지 않는 쪽으로 자기 생각을 바꾸는 것. 이것이 바로 인지 부조화이다.


성품은 좋은데 리더십도 없고 인지 부조화인 상사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보아하니 M과장도 인지 부조화 상태다. M과장의 아래 직원들이 나에게 하소연한다. M과장과는 대화가 되지 않을뿐더러 자신과 관련한 문제가 생기면 자꾸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는 거다. 또한 과장의 권위가 무시당한다 싶으면 자신을 과장으로 인정은 하냐며 분노한다. 심각하다. M과장은 나르시시스트 기질도 높아 보인다. 일단은 최대한 거리를 두라고 했다.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목적을 위해 능수능란하게 상대를 조정할 줄 아니, 이용당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M과장은 모두가 인정할 만큼 일을 잘하는 실력자다. Y가 약자 편에 서지 않고 M과장을 두둔한 것도 M과장의 성과 덕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M과장처럼 실력은 좋은데 성품은 별로인 상사를 만나면 또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전 03화 나의 직장人生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