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인과 조직 사이에서 -
# 내 조직 생활의 장단점
반평생을 회사 조직에 몸담고 정년 퇴임을 하신 분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그 안에서 많은 일들을 겪고 해결하고 버텨내고 일상을 유지하는 일이 어디 보통 일이던가. 특별하지 않은 그 꾸준함이 더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늘그막에 조직을 벗어난 퇴직자들은 자신의 조직 생활을 어떻게 반추할까?
내 조직 생활의 경우, 지난 15년을 뒤돌아보면 반반이다. 개인의 성장이 한계점에 봉착할 수 있는 여러 환경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게 최악이지만, 그 한계가 있었기에 그걸 딛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반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순탄하게 흘러가는 순반향의 힘보다, 괴롭더라도 거슬러 올라가는 역방향의 힘이 더 센 법이다. 그 힘을 잘만 활용하면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의 경쟁력과 가치를 실험해 보고 다양한 기회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조직 생활의 이점은 많다.
이외에도 여러 파트의 사람들과 손발을 맞춰야 하는 다양한 업무를 통해 다양한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단지 업무 기술을 익힐 뿐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사회적 소통 방법을 터득하고, 나와 다른 가치관을 이해하는 폭도 키울 수 있었다. 데드라인이 정해진 큰 규모의 업무는 조직의 힘을 빌려 속도를 낼 수 있었고, 다양한 관점의 피드백을 통해 내 업무와 나 자신을 객관화할 수도 있었다.
물론 직장 동료들 간에 성격이나 일의 방식이 달라 부딪히기도 하고 답답한 적도 많다. 또한 마감 시간에 대한 압박감과 업무 성과에 대한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에 탈이 나기도 하고, 난데없는 오해와 질시를 받아 마음고생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론 좋은 일만 내게 득이 된 게 아니라, 나쁜 일도 겪어 냈을 때 성장할 수 있었다. 힘들었던 그 당시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내면을 더 단단하게 하는 자양분이 됐다는 걸 깨닫게 됐다.
# 조직에서 꿈꾸는 이상향
지금의 나로 성장하기까지 조직 생활의 힘은 컸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다시 생각한다. 난 앞으로 이런 조직에서 더 성장을 이뤄낼 수 있을까? 고개가 저어진다. 앞서 파악한 비합리적인 조직의 운영 행태와 리더의 무능함 속에서 내가 맡은 프로젝트의 업무 효율성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 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도 개선이 없는 현실에 내 열정과 사기도 떨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그 어느 때보다 잘 파악하게 돼서 더 고개가 저어진다.
난 이건 잘하는데, 저건 못하네
연차가 쌓이니, 이제 내가 잘하는 것과 잘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구분된다. 내 나이엔 잘 못하는 것에 신경을 쓰기보다, 내가 잘하는 것에 집중할 때 더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은 여러 파트와의 공동 작업이 많다 보니, 합의를 얻어 내야 되는 글을 주로 쓸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내고 싶은 색깔은 초록색이더라도, 다른 색을 주장하는 업무 파트너의 색도 반영을 해야 하는 거다. 조직에선 나 개인이 맘에 들지 않아도, 조직 공동의 합의를 무시할 순 없는 일. 결과에 대해 모두가 좋다고 했을 때, 난 별로인 적이 얼마나 많았나. 모두가 박수 칠 때 나도 그냥 따라 쳤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 마틴 스콜세지 감독-
"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 - Martin Scorsese -
이제는 내가 내고 싶은 색을, 그냥 내고 싶다. 난 초록색이 좋아서 초록색을 낸 것인데, 왜 초록색이어야 하는지 상대를 설득시키는 것에 더는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 않다. 특히 창의적인 분야의 일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인데, 내 색이 자기 색과 맞지 않는다 하여 잘못됐다는 식의 평가를 조직 사회로부터 더 이상 받고 싶지 않다.
물론 그간 조직 생활을 통해 배우고 익힌 게 있으니, 나만의 색을 만들 수 있었고 내 색을 주장할 수도 있게 된 거다. 하지만 일정 이상 성장하게 되면 곧 깨닫게 된다. 여기서 더 조직에 몸담고 있는 이상, 가장 개인적인 것으로 가장 창의적인 일을 내기란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걸.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그러한 업무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리더와 조직이라면 모르겠지만, 내가 몸담은 관료제 같은 조직은 실현되기 어려운 이상이다. 대체적으로 불특정 다수를 골고루 만족시킬 수 있는 작업물을 원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만의 색을 띤 창의적 결과물이라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저 나와 같은 색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거움을 공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뿐이다. 이제는 나처럼 초록색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초록색의 미학이 무엇인지 공유하고, 초록색으로 어떻게 우리의 삶과 세상을 더 아름답게 물들일 수 있을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그렇게 매 순간 의미 있게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노동과 경제, 그 이상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어쩌면 직장인 모두가 꿈꾸는 유토피아는 이런 게 아닐까.
직장에서 나의 이상은?
경제적 가치 창출?
조직의 리더?
인권과 개성 존중?
사람마다 직장에서 추구하는 이상은 다르다. 누군가는 무엇보다 열심히 돈을 벌어 가족과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길 바랄 테고, 누군가는 조직의 수장이 될 그날을 꿈꾸며 열심히 승진 단계를 밟아 나갈 거다. 그러나 나의 이상은 우수한 업무 결과로 보상받으면 만사 오케이가 아니다.
존중과 신뢰 속에 합리적인 업무 과정이 진행되는 것, 가장 개인적인 것으로 가장 창의적인 것을 이뤄낼 수 있도록 조직 시스템이 구성되는 거다. 그러나 나의 이상과는 너무도 다른 직장의 현실.
이게 바로 내가 조직을 떠나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