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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유로우니까.

말락 마타(Malak Mattar)

by 정물루

홍콩할머니. 어렸을 때, 절대 눈을 마주치거나 말을 걸면 안 되는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를 ‘할머니’가 있었다. 주로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고, 정체불명의 커다란 이민가방이나 보따리를 들고 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잡아간 아이들이 있다고 들었다. 틱톡이나 유튜브 같은 소셜미디어가 없던 시절, 우리 어린 시절의 무서운 소문들은 아이들의 입을 통해 구전처럼 퍼졌다.


홍콩할머니를 멀리서 봤다는 아이도 있었고, 누가 잡혀갔다는 소문도 돌았다. 꿈에서라도 그 홍콩할머니를 만날까 두려워하며 잠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럴 땐 꼭 악몽을 꾸고, 그다음 날은 엄마 옆에서 자야만 했다. 방에서 혼자 잘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어린이 유괴 사건, 장기밀매 루머가 종종 있었고, 그런 낯선 사람을 조심하라는 경고의 서사였던 것 같다. 그렇게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날이면 며칠씩 잠을 설쳤고, 길을 걸을 때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심하곤 했다.


친구들과 자주 하던 놀이가 생각난다. What if... 만약 이런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래? 같은 ‘만약에’ 놀이.


만약에 홍콩할머니를 만나면?

만약에 납치를 당한다면?

놀이공원에서 엄마아빠를 잃어버린다면?


‘만약에’라는 말 뒤에 숨은 두려움은 늘 상상이었고, 그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만약에' 게임을 했다. 그런데 지구 어딘가에서는, 이 ‘만약에’들이 진짜로 벌어지고 있었다. 아이들의 눈앞에서.


성스러운 땅, Holy Land라 불리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가족들과 살던 집이 무너지고, 불이 나고, 파편에 맞고, 부모와 형제, 친구들, 선생님을 잃은 아이들이 수만 명이다. 친구와 싸워서 울고, 엄마에게 혼나서 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약에’라고 상상했던 그 무서운 세상 안에서 아이들이 진짜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아이들의 마음을 어떤 상태일까. 그 마음속 슬픔, 공포, 분노, 외로움을 안고 살아간다는 건, 너무나 슬프다.



말락 마타(Malak Mattar) 역시, 어릴 때부터 학교에 가지 못하거나, 집 밖을 마음대로 나설 수 없는 날이 많았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도, 페인팅 재료조차 가자 지구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이 모든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재료들로, 무서울 때마다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많이 그렸다. 그리는 동안만큼은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아 행복했다고 한다. 상황이 나아져 학교에 다시 갈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동안 그린 작품으로 학교에서 전시도 했고, 해외의 여러 갤러리에서 전시 초청도 받았다. 하지만 작품을 바깥으로 보내는 것도, 말락이 출국하는 것도 자유롭지 않았다.


말 그대로, 가자는 감옥이었다. 사람과 물자의 입출입은 물론, 먹을 수 있는 음식, 말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까지 모두 통제되던 공간. 그곳이 말락의 고향이었다.


“I paint to survive. My art is my voice, my escape, and my protest.”

나는 살아남기 위해 그린다. 예술은 나의 목소리이자, 탈출구이며, 저항이다.



말락 마타는 1999년 가자 지구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그림엔 큰 눈을 가진 여성, 물고기, 비둘기, 나무가 자주 등장하고, 강렬한 색감과 초현실적 이미지가 혼재한다. 여성들은 어머니처럼, 혹은 전사처럼 그려진다. 말락은 어느 인터뷰에서, '여성은 생명을 낳고 지키는 존재이며, 팔레스타인에서는 그 생명이 언제든 위협받는다'라고 말했다.


물고기, 비둘기, 나무는 자유로운 삶에 대한 희망, 뿌리내림에 대한 갈망, 자신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말락은 고통을 그리면서도, 동시에 희망을 그리는 작가다. 그림을 통해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마음을 세상에 전하고 있다.


그 마음을 담아, 2022년에 동화책 <Sitti’s Bird: A Gaza Story (할머니의 새: 가자 스토리)>를 출간했다. Sitti는 말락의 할머니를 의미하며, 전쟁 속에서도 가족의 사랑과 꿈, 희망을 품고 살아갔던 어린 시절을 담은 이야기다. 팔레스타인 아이들에겐 희망을,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는 그들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고 말락은 전한다.


말락의 동화책은 예술이 말할 수 있는 힘, 예술이 건넬 수 있는 마음, 그리고 예술이 감당해 내는 기억을 담고 있다. 그 책을 읽고 있자니, 어느새 내가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마음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상처는 너무 깊었고, 나는 그런 세상을 만든 어른의 하나로서 무기력해지기도 했다. 더 많은 어른들이, 말락의 책과 작품들을 통해 그 아이들의 상처입은 마음이 보이길, 바란다.


IMG_4503.jpeg <Sitti's Bird: A Gaza Story> 중, 한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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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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