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자시르(Emily Jacir)
"우리 엄마 볼에 뽀뽀해 줘.”
“우리 아버지 무덤에 꽃 좀 놓아줄 수 있어?”
“내 고향집에 가서 창문을 한번 열어줘.”
“내가 어릴 때 먹던 아이스크림, 그거 하나 사서 한입 먹어줘.”
소원이라고 하기엔 너무 소박하고, 부탁이라고 하기엔 애틋한 말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바람이었다.
현재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나 서안지구에 살고 있더라도, 원래 그들의 땅이었던 지금의 이스라엘 영토에는 쉽게 들어갈 수 없다.
가자지구 주민은 그 작은 땅 안에서조차 자유롭게 이동하기조차 어렵다.
멀리서 보이는데도, 도무지 갈 수 없는 곳.
우리나라에도 고향이 북한인 사람들은 휴전선을 넘지 못한다.
이와 같은 소원들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고 있을 듯하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미국인 예술가, 에밀리 자시르(Emily Jacir)는 미국 여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그녀는 예술가로서 전 세계에 흩어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제가 당신을 대신해서 팔레스타인에서 뭔가를 할 수 있다면, 무엇을 해드릴까요?”
If I could do anything for you anywhere in Palestine, what would it be?
그리고 도착한 요청들을 하나하나 실행에 옮겼다.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고, 요청자의 말과 함께 전시했다.
그 사진들은 너무나도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이었기에, 어딘가 이상했다.
이 작업은 단순히 부탁을 들어주는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평범한 이동의 자유가 어떻게 제한되고 있는지,
그들의 일상이 얼마나 쉽게 검열되고 박탈당하는지를
가장 감각적이고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예술적 실천이었다.
에밀리에게는 너무 쉽고 당연한 자유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평생 이룰 수 없는 꿈처럼 느껴졌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일상의 순간들이,
누군가에겐 너무도 먼 이야기일 수 있다는 사실.
그걸 깨달을 때, 지금 내가 누리는 삶이 얼마나 정치적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동시에, 팔레스타인인들이 겪는 고통은
단순한 피해가 아니라, 부정당한 존재에 대한 억압처럼 느껴졌다.
2025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여권으로 선정된 나라는 싱가포르다.
193개 국가에 무비자 또는 도착비자로 입국이 가능하다.
그 뒤를 일본과 대한민국이 따르고, 독일, 핀란드, 캐나다, UAE, 미국 등이 상위권에 속한다.
이들 나라의 여권을 가진 사람들은 거의 전 세계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반면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소말리아, 남수단, 북한 등은
무장 충돌이나 정치적·경제적 불안으로 인해 여권의 가치가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이들은 이동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으며,
국제 사회에서 외교 협상력이나 정치적 입지도 매우 낮다.
그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느냐는 사실 하나로
삶의 불평등이 시작된다.
이동의 자유는 물론이고, 교육과 안전, 미래에 대한 설계까지
한 사람의 인생이 그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그 나라의 정치적 위상에 따라
이 조건은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지금 내 일상은 정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냥 태어났을 뿐인데,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여권을 갖게 된 것처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스라엘과 하마스(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의 전쟁을 보면,
서로의 입장을 정당화하며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척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아무리 설명하고 주장해도 결국 모든 것은 주관적이라는 걸.
누구나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해석하고, 행동한다.
그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이제는 더 이상 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성적인 척, 공정한 척 말고 -
흔들리고 복잡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무의식의 진실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인간이고, 예술이 시작되는 곳이며,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며 함께 걸어가야 할 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