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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저주

예술은 사람들의 의식에 마법을 건다.

by 정물루
"예술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은 바꿀 수 있다."


이미지 없는, 기록 없는 역사는 사라진다. 그래서 유치원에서부터 일기쓰기를 가르치나 보다. 글을 완전히 깨우치지 못하는 시절부터 그림일기를 통해 하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 기분, 감정을 그리는 것으로 기록의 첫걸음을 뗀다. 요즘은 굳이 일기를 쓰지 않아도 스마트폰 카메라로 하루의 순간들을 왕왕 남긴다. 글이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기록을 해야 나중에 돌아봤을 때 기억이 살아나고,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이미지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보는 게 아니라 - 그 기억을 다시 살아보는 것이며, 그 기억을 통해 역사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미술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 1953–) 은 미술을 단순한 시각예술이 아니라, 역사적 상처와 기억이 응축된 사유의 장으로 바라본다. 즉, 이미지란 단순히 ‘보이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예술가 스티브 사벨라(Steve Sabella) 는 베를린을 기반으로 사진, 필름, 책 등 다양한 매체로 작업하는 작가다. 그의 저서 <The Artist’s Curse(예술가의 저주)>를 우연히 읽었다. 제목만 보면 예술가의 운명을 비관적으로 말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예술가로서의 태도, 예술 생태계에서의 생존, 그리고 시장과 제도 속에서의 독립성을 다루는 철학적이고도 비평적인 에세이다.


책 제목의 Curse(저주) 는 아이러니하게도 예술가의 축복이자 짐을 의미한다.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사회적 고립과 경제적 불안, 제도적 착취 속에서 버텨야 하는 고통이기도 하다.


책은 200개가 넘는 짧은 단상(aphorism)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단상은 Curse 1, 2, 3...의 형식으로 번호가 붙어 있다. 사벨라가 세상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선, 정체성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예술가로서 작업을 이어가는 이유, 작품을 사고파는 시장에서의 예술가의 위치와 마음가짐에 대한 현실적인 통찰이 담겨 있다.


그의 삶은 늘 불편하고 모순적인 경계 위에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인으로, 베를린에서는 외국인으로, 그리고 ‘아랍인 같지 않은 이름’을 가진 이방인으로 살아왔다. 그런 삶 속에서 그는 예술을 멈추지 않았다. 예술이 그의 인생을, 인생이 그의 예술을 끊임없이 밀고 당겼다.


불편한 진실도, 모순적인 순간들도 기록해야 한다. 멈추지 말고, 계속 기록하고, 만들고, 그려야 한다. 그렇게 남긴 기록이 결국 예술이 된다. 기록이 남아야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던 사실도, 왜곡된 역사도 스스로 보고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예술은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체다.


그렇다. 예술은 수많은 정보와 콘텐츠 속에서 그냥 주어지는 대로 흡수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고 상상하게 만드는 동기부여다. 그러니 예술이 독립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소비자의 취향이나 시장의 트렌드에 따라 만들어진다면, 그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 흔들릴 것이다.


<The Artist’s Curse(예술가의 저주)>는 매우 솔직하다. 런던의 소더비 인스티튜트에서 미술경영 석사를 공부한 그는, 예술 시장과 컬렉터, 거래 구조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트렌디한 작품이 ‘비싼 예술’이 되는 것은 그 작가의 재능보다도 복합적인 요인에 달려 있다. 클리셰 같지만, 사실이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내면이다. 세계관이 뚜렷하고, 정직하며, 진심이 담긴 예술가의 작업은 누구라도 알아본다. 그리고 그런 작품은 누구라도 감동시킬 수 있다. 예술은 그렇게 강한 힘을 지닌다.


그의 책 중 Curse 209 – The Power of Art 에는 한 편의 실화가 등장한다. 2005년, 가자(Gaza) 지구에서 무장한 남성들에게 납치된 사건이다. 그들은 감옥에 있는 가족의 석방을 요구했고, 사벨라와 그의 동료를 인질로 잡았다. 그는 총으로 둘러싸인 방 안에서 납치범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삶과 예술에 대한 대화였다. 그리고 명함 한 장을 건넸다.


4년 뒤, 그는 그 납치범으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을 받는다. 그는 자신의 예술작품을 보고 감동받았으며, 자신이 그 납치의 주모자 중 한 명이었다는 고백과 함께 사과를 전했다.


당신 덕분에 한 사람의 목숨이 구해졌습니다. 당신은 그날 나를 용서했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아직 완전히 용서받지 못한 듯합니다.


사벨라는 말한다.


Art can do magic to the consciousness of people. 예술은 사람들의 의식에 마법을 걸 수 있다.


예술은 세상을 직접 바꾸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고, 그로 인해 세상이 달라 보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술의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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