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모든 주인공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드라마 속 의사: "암입니다."
일화: "드라마다 드라마. 가짜라꼬. 뭐 그런 걸 신경쓰노."
동일: "아따 이 사람아,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한당거 모른당가."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 6화에 나온 장면 대사다. 암병동 환자들이 다 같이 드라마를 보는데 갑자기 주인공이 암 판정을 받는다. 환자들은 실의에 빠져 고개를 돌리고 동일은 리모컨을 집어던진다.
대체 왜 작가들은 주인공들을 자꾸 암 환자로 만드는 걸까.
생각보다 암 환자는 많다. 2019년 국가암등록사업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에 새로 등록된 암환자만 약 25만 명이다. 매년 20만 명뿐이라고 쳐도 5년에 100만 명씩 새로운 암 환자가 새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끊임없는 연구 덕분에 다양한 치료법이 발견되고 있고, 덕분에 완치되는 경우도 매우 많다. 하지만 여전히 암은 어려운 병이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치료제가 좋아도 소수의 케이스를 제외하면 치료 과정은 고통스럽다. 낫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치료에 응하는 환자 본인은 물론이고,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도 늘 가슴 한구석에 묵직한 슬픔 덩어리를 품고 산다.
환자 한 명당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이 10명뿐이라고 쳐도 매년 약 200만 명이 암이라는 병 때문에 현재 진행형으로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우리 주변의 미디어는 암을 너무 가볍게 입에 올리고 있다. 영화든 드라마든 주인공이 고난에 처하는 상황이 오면 어김없이 주인공이 암 판정을 받지 않는가.
재미있게 잘 보던 영화나 드라마도 이런 설정은 정뚝떨 버튼이 될 수밖에 없다.
암 빼면 무슨 병도 빼고 무슨 병도 빼야 하는데, 허구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대체 무얼 소재로 쓰란 말이냐는 말도 일리는 있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의사들이 'n개월 남았습니다'라고 말하는 판타지 같은 장면은 넣기 전에 충분히 숙고해줬으면 좋겠다. 환자들은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하기 때문에 굳이 의사에게 이런 걸 물어보지 않고, 의사들도 알려주지 않는다. 의사라고 이걸 어떻게 알겠는가. 환자 본인의 의지와 마음가짐에 달려 있는 문제인데.
한 가지 더 희망하자면, 환자를 살리는 긍정적인 결말로 이어지면 좋을 것 같다. 버킷리스트를 모두 이루는 것보다, 그깟 버킷리스트 몇 가지 못 해내더라도 못된 병을 짓밟아 이겨내고 압도적인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결말이면 좋겠다.
응칠에서는 드라마를 보고 풀이 죽은 동일을 위로하기 위해 일화가 드라마 작가에게 쉴 새 없이 전화를 걸어댔고, 결국 작가는 일화의 정성에 감복하여 극본을 수정했다. 항암 치료가 너무 잘 돼서 완치가 가능해졌다는 결론으로. 그 장면을 본 암병동 환자들은 항암치료를 잘 받기 위해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운동까지 하려 한다.
가능하다면 방송사 등 플랫폼이나 제작사, 배급사 등이 ESG 경영의 일환으로 기부나 후원 같은 걸 하면 좋을 것 같다. 혈액암을 다뤘다면 혈액암협회에, 폐암을 다뤘다면 대학병원 폐암센터에, 범죄를 다뤘다면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 기부를 하는 것이다. '설정상 영화나 드라마에서 다룰 수밖에 없었지만 이를 보며 힘들어하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수익의 일부를 환자분들을 위해 나누려 한다'라는 취지로 말이다.
그리고 답답하거나 화가 나는 상황에 스스럼없이 '암 걸리겠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보이는데, 주변에 얼마든지 암환자나 그 가족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가볍게 말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환자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이런 작은 배려만으로도 큰 위안이 될 테니까.
이 세상 모든 주인공들의 건강을 기원한다. 그리고 부디 지금 이 순간에도 암과 열심히 싸우고 있는 모든 환자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행복하고 아름다운 결말이 찾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