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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강스백 Nov 15. 2019

잘 죽고 싶어서 잘 살려고요.

언제 죽어도 만족할 수 있는 삶



108배를 시작했다. 집 가까운 사찰도 귀찮아 꾸준히 집에서 먼저 해보기로 했다. 너무 힘들고, 마음이 지친 날, 무엇보다 엄마가 너무 미운 날, 보고 싶은 날. 어느 시인은 엄마를 꿈에서라도 만나면 억울한 일 하나 말하고 엄마품에서 엉엉 울고 싶다고 했는데, 나는 어디선가 엄마를 만나면 악다구니부터 쓰고 싶다.

"나 돈 좀 줘! 죽어도 그렇게 죽는 게 어딨어! 이렇게 거지같이 살게 하는 게 무슨 부모야? 빚 때문에 내가 얼마나 괴로운 줄 알아? 어떻게 이렇게 살게 만들어? 돈 줘! 돈 달라고! 돈 좀 달라고."

108배를 하면서 울부짖었다. 땀이 나기 시작했다. 숨이 찼다. 멈추지 않고 계속 절을 했다.

'그래도 엄마 죽고 5년이나 버텼네. 아빠 죽고 3년을 잘 버텨냈어. 이번 한 달도, 일주일도,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잘 해냈어. 굶지 않고 맛있는 밥을 먹었네. 어젠 고기도 먹었지. 아이가 병치레 안 하고 활발하니 얼마나 좋아. 지나가는 구름이 예쁘네. 오늘은 날씨도 포근하구나. 아. 감사하다. 감사합니다. 지금 이 순간, 보이는 모든 것, 생각나는 모든 것, 죽으면 느낄 수 없는 것.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정하기로 했다. 내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감사'라는 것을.



엄마가 아플 때 신점, 사주 본다는 곳을 많이 다녔다. 우리의 사주에는 그 해 상복을 입을 일이 없다고 했다. 아빠의 사주에는 엄마가 아프지만 죽어서 구덩이에 묻을 일은 없다고 했다. 엄마 본인의 사주에도 고비를 넘기겠지만 명은 유지된다고 했다. 엄마의 상태가 안 좋아지면 안 좋아질수록 그런 곳에 더 쫓아다녔다. 갔던 점집에 다시 갔다. 무속인은 가족의 사주를 적고 책을 훑어보더니 계속 고개를 갸우뚱했다.

"혹시 어머니 돌아가셨는가?"

소름이 돋았다. 안 죽는다면서... 그분은 엄마가 죽는다는 말은 끝까지 안 했지만 복비를 안 받으려 했다. 그렇게, 엄마가 가는 날까지 우리는 불안했다. 죽음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ㅡㅡ

아기책을 물려받았다. 많은 책들 중 눈길 가는 책이 있었다. "죽음"이라는 책이었다. 어린이 백과사전 같은 시리즈 전집이었다. 책 표지는 상여꾼들이 꽃상여를 들고 가는 사진이다. 참 의아했다. 우리 어렸을 때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말하기만 해도 혼났다. 그런데 책에서 죽음을 설명하다니. 사람은 태어나서 언젠가는 죽고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슬픈 일이라고 명시되어있다. 이걸 아이가 알아야 하나 잠깐 멍했다가 정신을 차렸다. 어쩌면 내가 부모의 죽음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감에 빠졌던 것이 죽음을 너무 멀게만 생각한 결과일 수도 있다. 내 부모뿐만 아니라 누구나 죽는다. 시한부를 받은 사람 간병을 하다가 사고로 건강한 내가 먼저 죽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내 엄마는 죽음에서 비껴갈 거야. '

이 전제로 치료를 하니 모든 게 의심스럽고 불안했다. 만나면 헤어지는 게 당연하고 그중의 하나가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엄마를 좀 더 편하게 보내줄 수 있었을까?

'내 엄마만은 아닐 거야, 살아날 수 있을 거야, 지금부터 노력하면 돼.'

헛된 희망이었다. 죽음을 부정하고 외면하고 도망간 것이었다. 그럴수록 죽음의 그림자가 더 짙게 찾아왔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제사도 치렀다.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다. 엄마 죽은 지 2년. 아빠도 돌아가셨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빠의 죽음은 덜 아프다. 엄마의 죽음을 한번 치러서 그럴 수도 있다. 아빠는 주식한다고 빚을 져서 그 빚을 갚겠다고 지어 올린 전원주택을 헐값에 팔았다. 그리고 그 돈을 갚지 않고 다시 주식에 넣었다. 그걸 아빠 돌아가시고 알았다. 아빠 돌아가시고 고소장이 날아왔다. 그 빚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상속되었다.

알코올 중독으로 술만 마시면 엄마와 나를 괴롭혔다. 새벽 세시 네시까지 잔소리를 들을 때도 있었다. 최근까지도 수면장애로 고통받고 있다. 살아생전 그렇게 나를 괴롭혀 놓고 죽어서까지 빚으로 고통받게 한 것에 대한 분노일까. 여동생의 결혼식 전날, 돌봐주는 이 없이 홀아비로 살아간다는 게 마음 아팠다. 그래서 엄마가 아빠를 데러 가 버렸을까?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행복한 모습을 함께 하고 떠났기 때문에 마음이 조금은 덜 아픈 것 같다. 엄마가 돌아가실 때는 이 세상의 불행이 모두 우리 집으로 쏟아진 느낌이었다. 분노, 증오, 짜증, 무시, 싸움, 가난, 니탓 내 탓, 슬픔, 두려움. 엄마는 모든 불행을 안고 떠났다.

아기의 100일, 엄마가 있었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빠는 외손주를 안아보겠다고 손을 씻었다. 아기가 너무 어려 내 몸도 추스르기 힘든 데다 남편에게 눈치가 보여 주무시고 가라는 말 한마디를 못했다. 아빠도 누구보다 가족이 필요했을 텐데, 함께 살 사람이 필요했을 텐데. 나 사는 게 힘들다는 이유로 외면한 미안함. 그날은 내 미안함만 빼면 최고로 행복한 날이었다.

"사진을 못 찍었네. 아기 100일인데 사진 한 장도 못 찍고. 추석 때는 가족사진 한 장 찍자."

남편의 말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빠의 장례식에는 내 결혼식 때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렸다. 그래도 행복한 모습을 보인 게 마지막이라 다행이다는 안도감으로 이기적인 못난 자식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래도 아빠는 그 빚으로, 그 큰돈으로 주식도 하고 1000만 원짜리 색소폰도 사서 불고, 친우들과 중국 여행, 제주도 여행도 갔다 왔잖아. 내 결혼식 때 한 푼도 안 줬잖아. 내가 500만 원만 있었으면 얼마나 바란 줄 알아? 동생들은 그래도 결혼할 때 돈푼이나 건졌네. 나는 아빠가 불쌍해서, 미안해서 돈 달란 말 한 번을 못했는데 나한테 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어?'




삶과 죽음은 언제나 함께 있다

아이 어린이집 덕분에 핼러윈을 알게 되었다. 귀신 분장하고 사탕을 얻으러 다니는 축제 정도로만 생각했다. 남의 나라 명절을 우리가 왜 즐기나 싶어서 별 관심 없었는데 요즘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누구는 일해야 하고 누구는 기분 나쁘고 누구는 슬픈 우리나라 명절과 다르지 않은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핼러윈, 나도 즐겨야겠다.

재밌게 즐기는 핼러윈 축제에 비해 그 유래는 의미심장했다. 죽음의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죽은 자를 위로하고 복을 비는 제사. 그래서 핼러윈 분장이 무서웠구나.

우리는 죽음이 나와는 관계없는 듯 살고 있다. 나에게는 아주 먼 일이라고 생각한다. 장성한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행복하게 눈을 감는 것, 모두들 울고 있고 나 혼자 웃으며 죽는 것. 내 부모는 그렇게 아름답게 죽지 못했다.

아이가 태어난 날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일이다. 아빠는 여동생의 결혼식 전날에 돌아가셨다. 엄마가 떠나던 해에는 세월호에 탔던 많은 아이들이 먼저 떠났다.

'저렇게 많은 아이들을 한꺼번에 데려갔으니 우리 엄마는 좀 천천히 데려가면 안 될까요?'

물론 이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삶과 죽음은 언제나 함께 있다. 나의 죽음을 생각한다. 언제 죽더라도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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