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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창고 Feb 05. 2021

길에서 만나다

산책뒤끝記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공원에는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 



바로 철새다. 

철새 하면 리더로 보이는 새가 무리를 따라다니며 연신 꽥꽥 소리를 질렀던 장면이 떠오른다. 

이등병 기러기를 갈구는 괘씸한 선임이 분명하다. 

군 시절 아침저녁으로 알통 구보 -윗옷을 모두 벗고 뛰는 훈련-를 했던 길에는 겨울 철새가 있었다. 

그들은 나처럼 같은 시간에 날았다. 

나는 제대했지만, 철새는 여전히 훈련 중이다. 

새의 V 대형을 바라볼 때마다 누구라도 붙잡고 ‘라떼는 말이야’하며 군대 커피를 사주고 싶어진다.





어느새 동장군의 화가 머리끝까지 나자 철새들은 생태공원을 떠났다. 

못내 아쉬웠지만 헤어져야 그리워할 수 있는 법. 

그렇게 철새는 내 기억에서 서서히 증발했다. 

한참 뒤 철새는 다시 돌아왔지만, 조류 인플루엔자 때문에 공원 일부가 폐쇄되었다가 따듯해진 요즘 다시 개방했다. 

오랜만에 되찾은 산책로로 새벽 사색을 즐기는데 반가운 철새 떼가 그곳에 있었다. 

하필 인적이 끊겼던 산책길을 기러기 떼가 독차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길을 비켜달라고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는데 -새에게 말할 방법도 없는데 고민했다- 경계하고 있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나 때문에 새벽부터 고생시키는 것 같았다. 

미안함에 빨리 지나다가 나도 모르게 까치발을 만들었다. 

가로등 너머로 똥이 많이 보였다. 

알고 보니 곳곳에 새똥 천지였다. 

인간이 다니는 길이 기러기 화장실이었던 것이다.

하긴 새의 처지에서 보면 인간의 길이든 아니든 똑같은 땅에 불과하다. 

하늘 전체가 길인 새는 길로만 다니는 인간을 어떻게 보았을까? 

새의 눈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일까? 

신기해 보일까? 

어쨌든 노크도 못하고 불쑥 찾아온 나를 용서해주게. 똑똑. 







개방된 길이 자꾸 생각나 다음날에도 새벽 사색을 떠났다. 

오늘은 새들이 길가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방해하기 싫어서 가만가만 걷는데 불쑥 검은 그림자 하나가 철새를 향해 후다닥 뛴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우리 아파트를 영역으로 삼은 길고양이 같았다. 

가로등 사이로 퉁퉁한 배가 드러났다. 

틀림없이 그였다. 

나름 우아하게 새를 향해 몸을 날렸지만 자고 있던 기러기만 깨웠다. 

철새의 긴 날개가 찬 공기에 여러 번 닿았다. 

입체적인 소리가 새벽을 깨운다. 

V자 대형은 어디 가고 우왕좌왕 내 머리 위를 휘저었다. 

혹시 새똥 세례를 맞을까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다. 

사고 친 고양이는 원래 그쪽으로 가려고 했던 것처럼 지나갔다. 

시원하게 도전해본 고양이의 길이 부럽다. 

때론 마음의 자로 가늠하는 것보다 몸으로 직접 재는 것도 필요하다. 

그는 알았고 난 알기만 했다. 

우리가 만난 길이 걸음만큼 멀어져 간다. 

이젠 철새 하면 고양이가 떠오를 듯하다. 

라떼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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