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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창고 Feb 26. 2021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산책뒤끝記

지나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잊고 있던 소중한 가치를 되찾곤 한다. 



산책로에도 무심하게 지나치는 대상이 있다. 

바로 방화수다. 

빨간색 고무통으로 된 방화수는 물을 한껏 머금고 있다. 

그는 커다란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삶의 목적을 잊지 않으려고 애쓴다. 

단호하게 닫힌 빨간 뚜껑은 무게감 있는 입술처럼 보였다. 

그는 입을 열 일이 없기를 바라는 표정으로 공원을 지키고 있다. 

긴 세월 동안 방화수는 변함없이 서 있었으리라. 

보기에는 볼품없지만, 생태공원의 화재를 막기 위해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녀석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겨울에는 그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채워진 물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얼기 일쑤다. 

방화수도 동물처럼 겨울잠을 자는 것 같다. 





나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봄, 여름, 가을 동안 애썼다고 격려하곤 하는데 오늘 누군가 잠자는 방화수 위에 쓰레기를 버렸다. 

겨울 동안 쓸모없어졌다고 금방 쓰레기통으로 변했다. 

애잔함이 밀려왔다. 

누구나 그와 같은 시기를 겪는 법인데 그새를 못 참고 가치를 꺾다니. 

돌이켜보면 나도 겨울철 방화수 같은 시절이 있었다. 

매일 얼어버린 물을 원망했다. 

추운 세상을 한탄하기도 했다.

그 후로 붉은 통을 보온하려고 애쓰거나 얼지 않는 물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쏟아부었다. 

단점을 끊임없이 개선하고 싶었다. 

늘 준비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럴수록 시간은 더 빨라지고 삶은 팍팍해졌다. 

내가 부정적인 것에 집착할수록 더 피폐해져만 갔다.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루카스 박사는 부정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 아이들을 대상으로 딸기 바구니 실험을 했다. 

바구니에는 85%의 싱싱한 딸기와 15%의 상한 딸기가 들어있었다. 

A그룹은 싱싱한 딸기를 골라서 담게 하고 B그룹은 상한 딸기를 골라서 담게 했다. 

그 후 바구니에 싱싱한 딸기가 얼마나 담겨 있었는지 물었다. 

A그룹은 싱싱한 딸기의 양을 거의 정확하게 맞혔지만, B그룹은 싱싱한 딸기가 전체의 절반도 안 된다고 말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났을까? 

B그룹은 상한 딸기만 바라보느라 싱싱한 딸기에 관한 정보를 놓친 것이다. 

보통 사람은 긍정적인 정보보다 부정적인 정보를 더 중요하게 인식하는데, 이를 부정성 효과 Negativity Effect라고 부른다. 

원시시대부터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서 나쁜 정보에 집중해왔다. 

생존에는 필요하지만 좋은 정보마저 묽게 만든다. 

시험 결과를 예로 들면 국어 점수 90점, 수학 점수 40점 중에서 우리는 낮은 수학 점수에 시선이 간다는 것이다. 

국어를 잘한 나를 칭찬할 줄 모른다.





내가 겨울만 바라본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나쁜 점을 지우느라 좋은 점을 깔고 앉았었다. 

만약 방화수가 겨울을 집착하느라 남은 계절을 헛되이 산다면 그때는 정말 존재의 의미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생각을 바꾼 나는 찾아온 겨울에 여유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더 긴 봄, 여름, 가을을 나답게 열심히 살기로 했다. 

나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며 증발한 물을 수시로 채웠다. 

쓰레기를 두 손 가득 들고 다시 방화수를 보았다. 

보면 볼수록 제법 그 자리에 잘 어울렸다. 

낡은 통에 익숙해지고 그의 가치를 알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는 잠결에 스스로 빛나는 방법을 속삭이는 것만 같다. 

그것만으로도 겨울철에 방화수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오늘은 어느 조각이 겨울이 될까?

그 외의 나머지는 빠짐없이 나의 봄, 여름, 가을이 되리라. 

아직 나에게는 싱싱한 딸기가 열두 척 아니 열두 개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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