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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익은 사과, 김혜순

전생에 백설공주였나 봐요

by 레마누


잘 익은 사과


- 김혜순 -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큇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은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 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 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사과를 칼등을 툭툭 쳐서 일단 사과를 기절시킨다. 왼손에 사과를 들고 오른손으로 사과껍질을 살살 벗기는데 껍질이 두꺼워서 과육이 많으면 안 된다. 껍집을 얇고 길게 늘어져야 한다. 빙그르르 사선을 그리며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그렇게 껍질을 벗겨서 말갛게 변한 사과를 여덟 조각 내고 하얀 접시에 담는다.



사과를 잘 깎아야 시집을 잘 간다고 하는데 애당초 나는 글러먹었다. 손이 작아서 왼손에 사과 하나를 잡지 못한다. 사과껍질을 깎는 건지 사과살을 벗겨내는지도 모르게 껍질을 벗겨내는 것도 모자라 도무지 벗겨낸 사과의 표면이 매끄럽지를 못하다.



엄마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깎지 말고 부엌에서 세팅하고 나오라고 하는데 드라마에서는 식구들이 둘러앉은 자리에서 예쁘게도 사과를 깎았다. 나는 사과는 잘 못 깎았지만 사과를 무척 좋아한다. 깨끗하게 씻고 한 입베어 먹는다. 아삭하고 달콤한 맛이 입 안에 가득 찬다. 사과는 어떻게 먹어도 맛있다,



이 시를 읽는 내내 입에 침이 고였다. 제목만으로 빨갛고 실한 사과가 눈에 보인다.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라니. 뭔지는 모르겠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알 것 같다. 그 싱그러움. 달고 아삭거리는 느낌. 사과를 먹을 때는 유독 아삭거리는 소리가 난다.


자전거바퀴가 치르르 도는 소리는 또 어찌나 선명한지. 어렸을 때 마당에 있는 할아버지의 커다란 자전거바퀴를 돌리면 돌던 때가 덩달아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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