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가을이-최승자

가을 하면 뭐가 떠오르나요?

by 레마누

개 같은 가을이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무너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그날 우리는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졸고 있는 구멍가게아저씨 앞에 담배 한 갑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내밀었다. 아저씨가 힐끔 쳐다보더니 아무 말없이 잔돈을 집어 주었다. 가방 안에 담긴 담배와 라이터는 은밀했고, 그만큼 설레는 무엇이었다.


-커피숍이 좋아.

-누가 보면 어뜩해?

-뭐, 어때? 보면 보는 거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심장소리가 어찌나 크게 울리던지 친구에게 들릴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생각했다. 시 창작수업을 들으며 친구와 나는 "최승자"의 시에 빠져 있었다. 시를 쓰려면 꼭 필요한 과정인 것도 같았다. 우리가 시를 못 쓰는 건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였고, 멋들어지게 담배연기를 내뿜을 수 있다면 교수님이 감탄할 시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날 우리는 담배를 커피숍 테이블 위에 놓고 나왔다. 둘 다 담배를 처음 피워봐서 그런지 재미도 멋도 없었다. 심지어 기침을 너무 해서 다른 테이블 사람들이 쳐다보는 통에 오래 앉아 있지도 못했다.



스무 살의 우리는 담배 하나도 제대로 못 피우면서 최승자의 시를 읽는다며 한탄만 했다. 그랬던 때가 있었다.



아름다운 언어로 노래 부르는 듯이 쓰는 게 시라는 걸 무참하게 깨뜨린 최승자의 시는 충격이었다. 어떻게 이런 시를 쓸 수 있을까? 가을을 표현하는 낙엽과 쓸쓸함, 이별 같은 뻔한 연상작용은 처음부터 없었다.



왜 시인은 가을을 개 같다고 할까? 매독이라는 입에 담기도 싫은 말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을에 갖다 댔다. 나만의 가을을 모독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도 같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궁금했다. 막연하게 느껴지는 뭔가가 있었다. 최승자 시인이 강렬하고 맹렬하며 처절하게 이야기하는 가을에는.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이렇게 쓰고 난 후 시인은 공책을 덮고 담배 한 대를 피웠을 것 같았다. 이 시는 첫 문장이 다했다.



쉽고 예쁜 시를 읽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끝이다. 어렵고 난해한 시를 읽을 때는 절로 눈썹을 찡그린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몰라 몇 번이나 곱씹어 읽는다. 읽어도 읽어도 모를 것만 같았던 문장이 어느 순간 이해될 때 희열을 느낀다. 시인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다가갔다는 기쁨에 혼자 피식 웃음이 난다. 바짝 들이댔던 얼굴을 뒤로 물리며 낮은 한숨을 쉰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시인들의 세계에 발만 담가도 어지러울 때가 있다.



순위를 매길 수 없다. 어떤 날은 알콩달콩하고 올망졸망하고 간지러운 시가 좋고, 어떤 날은 바짝 마른 장작 같은 건조한 시가 좋다. 오늘은?

오랜만에 걷기를 하며 바람이 많이 달라졌구나. 생각하다 문득 이 시가 생각났다.

개 같은 가을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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