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변명
그렇게 살기로 하자 그렇게 됐습니다
저는 고지식한 사람입니다. 인간관계에서는 그게 특히 심합니다. 한번 좋아하면 끝까지 그 사람을 믿습니다. 너무 엄청나게 잘못한 일이 아니라면 웬만하면 마음을 접지 않습니다. 그래서 연애를 오래 했습니다. 좋아했던 사람의 바닥까지 보고 나서야 마음을 정리합니다. 어쩌면 그 사람을 그렇게 할 수밖에 만들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저는 한 사람을 오래 사랑합니다.
좋아하는 가수나 연예인도 그렇습니다. 저는 아직도 이덕진이 제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내가 아는 한 가지"입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떡하니 앞에 두고 나면 다음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뭘 해도 그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제가 갈지자로 걸어도 길은 똑바로 갑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를 좋아합니다.
저는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새로운 변화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옆자리에 낯선 사람이 앉아도 괜찮습니다. 십 분이 지나면 그는 저에게 모든 신상정보를 털어놓습니다. 남의 말을 잘 듣고 기가 막히게 호응을 합니다. 친한 친구가 너의 액션은 가히 프로급이라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관객리액션대회가 있다면 순위에 들 것을 확신합니다. 상대의 작은 변화에도 격하게 반응하고 찬사를 보냅니다. 저의 리액션에 상대가 웃는다면 그것만 해도 성공입니다. 이때 중요한 건 진실성입니다. 뭘 해도 영혼이 없으면 말짱 꽝입니다. 내 앞의 사람이 정말 최고다. 하는 마음으로 박수를 쳐야 합니다. 정말? 어머 너무 재밌다. 는 것을 마음뿐만 아니라 눈과 행동에 오롯이 담을 줄 알아야 합니다. 저는 리액션 장인입니다.
산다는 것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삶은 매 순간 방지턱을 마련해 놓고 속도를 줄이라고 합니다. 한창 때는 턱을 넘으면서 출렁거리는 느낌을 즐겼습니다. 이런 게 스릴이지 하며 속도를 오히려 높이기도 했습니다. 젊음이란 터무니없는 용기를 끌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지금의 저는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뭔가를 할 때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크게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몇 번 꺾이다 보니 하는 것만도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전 같으면 "비겁한 변명입니다."라며 뛰쳐나갔을 것입니다. 지금은 달리는 사람에게 시원한 물 한잔을 내밀며 서 있습니다.
가만히 있다는 것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뭘 안 해도 시간은 흘러가는데 굳이 뭔가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박수를 쳐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이 주인공을 하면 드라마를 볼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이제 기꺼이 박수를 치는 사람이 되기로 했습니다. 지켜보는 사람. 기록하는 사람. 기억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저는 이야기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