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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Dec 11. 2023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하루

오래전에 읽은 책이다. 겨울이었고, 몹시 추운 날이었다. 한동안 러시아문학에 빠져 살았다. 제주의 겨울바람소리를 들으며 시베리아의 추위를 상상했다. 그들의 깊은 어둠과 한숨, 끝날 것 같지 않은 겨울의 깊이를 헤아리기에 십 대의 나는 어리고 어리석었다. 그래도 읽었다. 어린 내가 좁은 제주도에서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었던 건 책을 읽을 때뿐이었다. 십 대를 러시아문학에 빠져 살았다. 그중에서도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특히 인상 깊었던 기억이 있다. 수십 년이 지나 다시 읽자 나는 그만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거대한 권력 앞에 무기력한 인간


1951년, 평범한 농부였던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독소전 참전 당시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했다. 스탈린 정부는 슈호프의 행적에 조국을 배신했다는 죄목을 씌우고 강제 노동 수용소에 그를 보낸다. 슈호프는 그곳에서 8년째 수감 중이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슈호프의 하루 동안의 일어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인공 슈호프는 모진 수용소 생활을 버텨내는 사람이다. 그는 소박하고 단순한 사람이었다.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선한 것을 갈망하고 작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슈호프의 모습에는 어떤 숭고함마저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삶


 혹독한 시베리아의 추위와 참혹한 수용소 시설,  강제 수용소라는 스탈린의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국가 권력의 폭력 앞에서 인격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보며 과연 살아간다는 게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고난과 시련 앞에서도 사람의 도리를 잊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무자비한 폭력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온갖 종류의 인간 군상 속에서 나와 닮은 사람을 자꾸 찾게 된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스탈린 독재의 허울을 격앙된 목소리로 비판하기보다 담담하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약자를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인간의 삶을 폭력적이고 비극으로 만드는 정부의 횡포와 그들의 희생물이 되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부조리를 극대화한다. 




수용소 안의 다양한 인물의 삶과 형태들을 확대해 보면 현실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과 별반 다름이 없다. 상상할 수도 없는 비극적이고 비인간적인 상황은 솔직하고 과장 없는 작가의 묘사로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살을 에는 추위와 턱없이 부족한 물자, 인간적 대접을 포기한 사람들과 작은 이익에도 목숨을 거는 사람들, 추위와 굶주림에 인간성을 상실한 것 같지만 그 안에서도 유지되는 신뢰와 책임등은 수용소 안뿐만 아니라 스탈린 시대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강한 놈은 살아남고, 약한 놈은 죽는 법이다.   P.99



이젠 서두를 필요 없이 천천히 걸어간다. 종대원들은 모두 의기양양하다. 토끼들의 즐거움이다. 그래, 우리를 보고 놀라는 개구리들도 있다고 좋아하는 그런 즐거움 말이다.    P.166



죄수들에게는 이때가 하루 중에서 가장 춥고 배고플 때이다. 지금 같은 때는 맹물 양배축국이라 해도 뜨뜻한 국 한 그릇이 가뭄에 단비같이 간절한 것이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단숨에 들이켜게 된다. 이 한 그릇의 양배춧국이 지금의 그들에겐 자유보다, 여태까지 살아온 생애보다 아니, 앞으로의 모든 삶보다도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P.173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중략 -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P.229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주인공 슈호프는 선량한 사람이다. 따뜻한 가정이 있었고, 어렸을 때부터 나고 자란 고향이 있었다. 한순간의 실수로 슈호프는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강제노동 수용소에 끌려갔다. 10년의 형기를 받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원망하고 좌절하느라 보냈을 시간을 그러나 슈호프는 견뎌내고 있었다. 자신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하루를 보냈다.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느라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시간이 없다. 양배춧국에 감자 건더기 하나 있음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터진 신발 때문에 발이 시리다고 울고 있지 않고 신발을 어떻게 꿰맬까 고민한다. 그렇게 충실하게 살아낸 하루를 마치고 그는 거의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10년 하고도 사흘을 더 보내고 형기가 끝났다.




예전에는 읽을 때는 슈호프가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를 사지로 몰아낸 국가의 무능력하고 무자비한 폭력에 분노했다. 나이가 들어 다시 읽으니 슈호프의 인간성과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얼마 전에 티브이 드라마 <신병 2>를 재미있게 봤다. 드라마 속에서 장병이 제대를 하며 일병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작업수첩을 건네며 군생활의 꿀팁이라고 말한다. 일병은 일만 죽어라고 하는 거 아니냐며 이게 무슨 노하우냐고 물었다. 그러자 병장이 대답했다. "그런가? 그럼 그냥 부지런히 해. 뭐든."




똑같은 상황에서도 불평하는 사람과 적응하는 사람이 있다. 좌절하는 사람과 할 일을 찾는 사람이 있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강제노동수용소에서의 하루를 그려냈지만 삶의 보편적인 모습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묵묵히 하루를 견디다 보면 시간이 흐른다. 중요한 건 어떤 장소에 있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억울하고 속상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거의 행복했다고 생각하며 하루를 마감한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 슈호프를 만나서 좋았다. 삶이 단순해졌다. 주어진 것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 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당신도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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