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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May 21. 2024

삶은 계란

삶은 계란이다. 일요일 아침이었다. 오랜만에 늘어지게 잠을 자고 일어나 하릴없이 티브이를 틀었다. 이런저런 연예인들이 쭉 앉아서 서로의 결혼생활을 얘기하고 있었다. 



 저 여자는 행복할까? 출연자는 남편의 식성이 얼마나 까다로운지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5첩 밥상은 기본이고, 김치가 10종류가 넘고 철마다 장아찌를 담근다고 말할 때 사회자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여자는 그런 표정은 익숙하다는 듯이 "계란 프라이도 안 먹어요. 우리 남편은. "이라는 말로 종지부를 찍었다.


출처: 픽사베이


" 아니, 왜요? "

"그건 요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계란말이를 하던지 계란찜을 해야지. 프라이나 삶은 계란은 입에도 안 넣는다니까요."

 다시 한번 놀라는 사회자와 방청객들의 모습이 잡히고, 여자는  의자 뒤로 물러나 앉았다. 



 계란 프라이는 요리가 아니라는 남편과 살면서 삼시세끼 밥 차려주느라 시간이 없다는 여자는 한때 유명한 가수이자 라디오프로그램의 간판 디제이였다. 결혼과 동시에 모든 활동을 접었다고 하는데 왜 이제는 방송에 나와서 이런 얘기를 할까 궁금해질 무렵 두 사람의 이혼소식이 들렸다. 



 신작로길에서 “계란 삽써.”소리가 들리면 엄마는 뭘 하고 있던 손을 놓고 뛰쳐나갔다. 윗동네에서 길을 따라 파란 트럭이 천천히 내려온다. 길 가에 차를 세우고 계란장수가 내린다. 짐칸에 계란이 가득 차 있다. 엄마는 계란 두 판을 산다. 8 식구가 하나씩만 먹어도 3일이면 없어진다. 엄마는 매일 아침 된장국과 김치, 계란프라이로 상을 차렸다. 



아빠는 상을 잘 엎었다. 반찬투정은 아니었다. 된장국만 있으면 식은 밥이든 금방 한 밥이든 잘 먹었으니까 된장에 고추까지 있으면 두 공기는 거뜬하게 먹었다. 아빠는 밥을 많이 먹었다. 



문제는 술이었다. 밥은 된장국 없으면 못 먹으면서 술은 김치만 있어도 잘 먹었던 아빠는 해장술로 아침을 시작했다. 큰 딸인 나는 “내내 건강하세요”술을 따라주며 아버지의 건강을 기원했다. 



 엄마가 없으면 한 시간도 못 견디고 찾는 사람이 술만 마시면 엄마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모든 게 엄마 탓이었다. 돈을 못 버는 것도, 집안 꼴이 엉망인 것도, 밭을 날린 것도 노름에서 돈을 잃은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엄마 때문이었다. 심지어 할머니가 다리가 아파 걷지 못하는 것도 엄마 때문이라고 했다. 


술은 아빠의 화를 돋우는 촉매제였다. 아빠는 밥을 먹다 말고 상을 엎었다. 동그란 스테인리스밥상은 훌러덩 잘도 넘아갔다. 김치국물이 날아가 벽에 달라붙었다. 노란 알루미늄장판에 배긴 김치냄새는 아무리 걸레질을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무거운 상을 사지 않은 것도, 아빠가 쉽게 엎을 수 있는 밥상만 집에 있는 것도 엄마 잘못이다.



 계란을 냉장고에서 꺼낸다. 생각 없이 싱크대에 놓다 깨진 적이 있다. 그 후로 계란을 갓난아기 목욕시키듯 잡았다. 프라이팬을 올려놓고 가스불을 켠다. 기름을 두른다. 계란을 툭 쳐서 후리이팬에서 반으로 나누는데 아뿔싸 손가락 하나에 힘이 너무 들어갔는지 노른자가 깨졌다. 다른 계란들의 노른자는 멀쩡한 모습인 걸 보면 변한 건 아니다. 내가 잘못한 거다.



 삶은 계란이다. 신경 쓰지 않은 그 순간 일이 생긴다. 어떻게 사람이 매번 그렇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 수 있어? 가끔은 실수도 해야 인간적이지. 완벽하면 그게 사람이야? 로봇이지? 당신이 원하는 배우자는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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